모텐 H. 크리스티안센, 닉 채터 지음 / 이혜경 옮김
독서 기간 : 23.7.5 ~ 7.19
나의 한 줄 리뷰 : 언어에관한, 언어를통해 바라보는 모든 것을 다루는 내용과 심지어 번역마저 훌륭한 책.
하이라이트
1. 언어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규정하는 본질적 요소다.
2. ‘언어게임’이라는 용어는 말하기가 활동 혹은 생활 방식의 일부라는 사실을 부각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_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3. 역사 이래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들은 부득이하게 만나서 의사소통할 수밖에 없는 상황(대개는 식민지 상황이었다)에 수없이 처했다. 이는 본질적으로 쿡의 선원들과 하우시족이 맞닥뜨렸던 상황과 같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이 수년째 이어지면서 불행하게도 이 토착민들에게는 비참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만남이 장기화되면서 ‘피진pidgin’이라고 알려진 간소한 언어 체계가 전형적으로 출현했다. 어휘가 극히 제한적이고 문법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피진어와 같은 언어는 처음에는 제한적인 기능만을 수행한다. 즉 사람들은 피진어로 도구적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같은) 지시적인 (어디에서 어떤 도구로와 같은) 의사소통을 한다. 티에라 델 푸에고 제도에서의 만남이 그랬듯, 초기 피진어로는 시를 낭송할 수도, 뒷담화와 잡담을 나눌 수도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학습과 사용이 반복되다 보면 어휘가 확장되고 복잡한 문법이 생겨나면서 피진어는 소위 크리올 언어creole language라는 풍부한 언어로 서서히 발전하기도 한다.
4. 언어는 별개의 집단들에 의해 여러 번에 걸쳐 서로 무관하게 발전해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또한 그 과정에서 제스처와 음성의 비중은 아마도 그때그때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건 언어는 제스처 게임과 유사한 반복적인 상호작용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5. 성공적인 의사소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즉 타자의 입장이 되어보고 (최선을 다해) 타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오히려 우리가 이해받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
6. 우리는 주의력과 기억력이 놀랄 만큼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대체로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잠깐의 부주의로 대화 흐름을 완전히 놓칠 때처럼, 뇌의 한계가 언어 사용법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모두 경험으로 알고 있다. 우리의 감각과 기억이 심각할 정도로 제한적이라는 점에 비추어볼 때, 대화를 놓치는 것쯤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러한 뇌의 한계는 언어가 통과해야 하는 통로에 극심한 병목현상을 초래한다. 따라서 현재 진행 중인 대화에서 어딘가 다른 데로 정신이 분산되거나, 혹은 흥미를 끄는 생각과 일에 아주 잠깐이라도 마음을 빼앗긴다면 그러한 짧은 이탈로도 뇌는 밀려드는 언어 흐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뇌는 ‘우리가 방금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기억조차도 놀랄 만큼 빠르게 잊어버린다.
7. 우리의 제한적인 단기 기억 능력은 글자와 단어 같은 특정 유형의 요소뿐만 아니라 청크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런 식으로 청킹은 작은 요소들을 한데 뭉쳐 더 큰 요소로 만드는 데 일조함으로써 기억력과 주의력에 가해지는 부담을 덜어준다.
8. 말실수는 언어의 적시 생산 시스템이 내부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그러한 실수들은 청킹 단계에 따라 정확히 다른 양상을 보이며, 발음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청크들 사이에서 혼선이 빚어진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9. 인간은 대화라는 춤에 너무도 익숙해서 이 모든 복잡함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익숙하다는 사실에는 함정도 존재한다. 지금 아니면 사라질 병목 지점이 늘 따라다니며 압박을 가하는 상황에서 회오리처럼 빠른 속도로 역할 전환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말의 세부 사항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인상만을 대략 파악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우리의 이해력은 생각보다 피상적일 때가 많다.
10. 비록 우리가 알아차리는 것이 의사소통 빙산의 꼭대기 부분을 차지하는 단어와 구, 문장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려면 빙산의 보이지 않는 부분(우리가 문화와 사회 구조, 세상과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실제로 언어를 독백이 아닌 대화로 바라볼 때, 오직 그때만 무슨 말인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언어의 핵심은 본질적으로 쌍방향적이며 유동적이고 협력적이라는 데 있다. 언어라는 제스처 게임은 대화로 한바탕 멋지게 어우러지는 춤을 추는 것과 같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함께 힘을 모아 그때그때 하나씩 적시에 의미를 창조한다.
11. 의미의 가벼움과 형태 전환 능력, 비유적 특성 덕분에 우리가 현재 모아둔 단어들의 의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잡을 수 있다. 또한 제스처 게임을 벌일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우리는 새로운 어휘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 새로운 단어를 (대개는 오래된 단어들을 조합해) 만들어낸다.
12. 사실 영어에서든 다른 어떤 언어에서든 실제로 동의어인 경우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생물학적 종이 그렇듯, 두 개의 단어는 정확히 같은 영역을 오랫동안 동시에 차지할 수는 없다. 만약 둘 다 살아남으려면 서로 구별되는 다른 역할을 발전시켜야만 한다. 예를 들어 향기가 냄새보다 희미하고 기분 좋은 향이라면, 반대로 악취는 냄새보다 진하고 기분 나쁜 향이다. 또한 향수가 대부분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향인 데 반해 향기는 그럴 필요가 없다. 비슷하게 함박웃음이 즐거워하며 크게 짓는 미소라면, 히죽거림은 젠체하며 짓는 미소인 데 반해 억지웃음은 환심을 사기 위해 짓는, 일말의 진정성도 찾을 수 없는 미소일 것이다. 의사소통이라는 도구 상자에서 자기 자리를 잃지 않고 지키려면, 각 단어는 다른 단어와 뚜렷이 구별되는 분명한 역할을 가져야 한다.
13. 언어는 단어들이 어쩌다 우연히 한데 모여 이룬 집합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말하고 싶은 바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분적이긴 하지만 응집적인 하나의 체계다. 이 부분적으로 응집적인 의미의 연결망들은 언어마다 다르게 발전한다.'
14. 비트겐슈타인에게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일어나는 의사소통이야말로 언어의 출발점이다. 언어의 목적은 의사소통 게임을 통해 그 순간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전을 통째로 외운다고 해서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살펴봤듯이 사전에는 생명 같은 과학 용어조차 놀랄 정도로 진부한 내용으로 기재되어 있다. 사전은 우리에게 암시와 단서, 사례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 외 나머지 일은 우리의 창조적 상상력과 경험, 의사소통이라는 그 순간의 과제가 해결해야 할 몫이다.
15. 의사소통이 최적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려면, 의사소통적 단서의 두 가지 원천들(여기서는 소리와 맥락)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가능한 한 독립적이어야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소리와 의미의 관련성이 약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소리와 의미의 (상당히) 자의적인 관계를 추동하는 힘은 의사소통 효과를 높이기 위해 가해지는 끊임없는 압력이다.
16. 언어적 제스처 게임이 만들어내는 의미를 정밀한 수학적 체계로 환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착각이다. 언어의 유연성과 유희성, 변덕스러움은 형식 논리라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제거해야 할 약점이 아니다. 이러한 특징들이야말로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의 본질이다.
17. 언어의 필연적 쇠퇴라는 이 암울한 전망은 아주 오래전의 언어는 완벽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즉 세월의 풍상을 겪고 부정확한 말이 쌓이면서 언어의 완전성이 끊임없이 부식되고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언어 쇠퇴를 우려하는 사람들은 상당 부분 단어가 모호하거나 ‘부정확하게’ 사용되면서 의미가 둔화하고 약해진다는 점을 걱정한다.
18. 아무도 언어를 설계하지 않았다. 언어의 복잡성과 질서는 무수한 언어적 제스처 게임이 빚어내는 혼돈 가운데서 출현했다. 게임을 할 때 화자들은 특정 맥락의 특정인들에게 자신들을 이해시키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하지만 여러 세대에 걸쳐 언어가 사용되면서 놀랍도록 풍부하고 미묘한 패턴들이 서서히 나타났다. 언어의 시제와 상, 격, 어순 같은 문법 범주는 넋을 놓게 할 정도로 복잡하다. 단어를 구성하는 언어음의 목록들 역시 다양하고 기묘한 데가 있다. 아울러 각 언어에는 물리적, 생물학적, 도덕적, 정신적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방대한 단어 목록도 존재한다. 언어의 모든 복잡성은 자생적이고, 우연적인 질서가 누적되면서 발생한다. 매우 실질적인 의미에서, 인류의 가장 중요한 발명품은 우연성의 축적으로 만들어진다.
19. 새로운 언어 형태는 과거를 바탕으로 형성된다. 언어적 형태는 특정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면서 하위 패턴을 만들어내는데 이 패턴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풍부해지고 더 미묘해진다. 그러나 언어의 이러한 지속적 변화가 곧 불가피한 쇠퇴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언어가 변한다는 것은 언어가 살아 있다는 표지이며, ‘살아 있는’ 언어는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 언어 사용자들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것이 무엇이건 더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게 한다.
20. 언어의 역사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언어가 끊임없이 변화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언어의 점진적 변화가 복합적 결과를 초래했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지속적 쇠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고대 북유럽 언어는 무수히 많은 단계를 거쳐 현대 덴마크어와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아이슬란드어, 페로어로 변화했다. 이 언어들을 고대 북유럽 언어가 완전히 퇴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쇠락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본다면 매우 이상할 것이다.
21. 구문이란 일반적으로 후천적인 학습에 의해 습득되는 형태와 의미의 접합으로, 유의미한 부분들로 이루어진 단어(예를 들어 ~s, ~ing), 단어 자체(예, 펭귄)에서부터 다단어 숙어(예, 취향을 의미하는 cup of tea)와 추상적인 패턴(이를테면, the bigger, the better과 같은 구문을 만드는 the X-er, the Y-er 패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구문은 뇌가 계속해서 흘러 들어오는 언어적 투입물을 부호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청크(의미 덩어리) 단위와 완전히 일치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른다면, 결국 구문이란 뇌가 언어를 이해하고 만들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절차로 정신의 작동과 부합한다.
22. 사실 언어의 세부 사항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불완전한 패턴과 하위 패턴, 예외를 더 많이 발견하게 된다. 언어에 수학과도 같은 규칙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하나의 신기루다. 가까이 갈수록 언어는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불안정하고 결함과 별난 것으로 가득하다. 과거 촘스키의 제자였지만 자신의 스승과 이론적으로 완전히 결별한 피터 쿨리커버Peter Culicover는 이러한 패턴을 ‘구문론적 예외syntactic nuts’라 부르면서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흔한 언어학적 문제로 그때그때 나름의 분석과 설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모든 언어에는 소위 어떠한 보편적 원칙도 따르지 않는 대신에 특정 단어와 문법적 구문에만 의존하는 구문론적 예외 목록이 존재한다.
23. 언어를 역사적으로 분석해 보면, 구체적인 의미를 지녔던 몇몇 단어가 점차 그 의미가 ‘바래지면서’ 결과적으로 순전히 문법적이고 표준화된 역할만 남게 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언어음이 끊임없이 단순화되고 침식되기 쉬운 반면, 의미는 계속해서 확장된다. 더욱이 어떤 단어의 경우에는 의미가 확장하다 못해 거의 완전히 사라지기도 한다.
24.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즉 언어는 소리와 단어의 변화, 문법화를 비롯한 많은 요소가 수십, 수백 년 그리고 수천 년에 걸쳐 끊임없이 중첩된 결과물이다. 그러한 반복적인 축적과 쇄신의 결과, 언어는 질서정연하면서도 유쾌할 정도로 변덕스러울 뿐만 아니라 시, 법률, 과학 등 인간의 경험 전체를 아우르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떤 세대건 화자들은 언어가 조금만 변하는 조짐을 보여도 활기와 창조성의 징후가 아니라 언어적 퇴보, 심지어는 정신적, 사회적 쇠락의 전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25. 언어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의 지각 운동 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기억하는지, 그리고 관례화를 통해 의미를 어떻게 창조하는지 같은 문제에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제약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제약들은 한데 어울려 다른 언어를 만드는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가중될 수도 있다.
26. 언어는 우리가, 특히 어린아이들이 학습하도록 진화해 왔다. 따라서 언어는 어린아이에게 일종의 놀이다. 언어 학습은 우리에게 쉬운 일이다.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뇌와 인지능력을 갖춘 이전 세대로부터 다름 아닌 우리의 언어를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27. 뛰어난 언어 구사력을 갖추기 위해서 어린아이들은 최소 1만 시간 동안 언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해야 한다(2장에서 살펴본 무작위적 숫자 기억 천재 스티브 팔룬이 기억력을 연마하기 위해 200시간을 연습했다는 사실을 무색하게 하는 시간이다). 상대방과 빠르게 순서를 바꿔가며 주고받는 일상의 대화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연습을 통해 비좁은 지금 아니면 사라질 병목 지점으로 언어를 밀어 넣는 법을 학습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의 반복적인 대화 경험 덕분에 우리는 듣는 동안 입력된 소리들을 재빠르게 청크하는 능력을 발달시키고, 또 말할 때는 청크들을 적시에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언어 학습에 중요한 것은 연습에 연습, 그리고 더 많은 연습이다.
28. 어디 출신이건, 혹은 얼마나 많은 돈을 벌건 모든 부모는 자녀들이 밝은 미래를 누리기를 원한다. 불행히도 많은 어린아이와 부모가 빈곤과 차별, 구조적 인종차별과 다른 여러 사회적 요인과 같은 성공의 주된 걸림돌을 마주하는 것이 현실이다. 실질적인 정책의 변화만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어쩌면 우리는 로셀섬에서 자라는 어린아이로부터 어떤 중요한 교훈을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선 우리는 부모들에게 단순히 더 많이 자녀에게 말하라고 주문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대신에 자녀와 함께 짧은 시간 동안 적극적이고 집중적으로 대화를 나눌 시간대가 하루 중 언제인지를 찾아야 한다. 양이 아니라 질이 관건이다. 분출하듯 이루어지는 집중적인 언어적 상호작용 시간대를 하루 중 여기저기에 배치해야 한다.
29. 언어들이 지금 아니면 사라질 병목의 협소한 터널을 비집고 통과할 수 있는 한, 또한 의사소통 빙산의 가라앉은 부분에 단단히 닻을 내리고 있는 한 언어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달라질 수 있다. 어쩌면 인간 언어의 광범위한 이질성(무한하기에, 가장 아름다운 언어의 형태들)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의사소통 체계와 언어를 구별 짓게 해주는 하나의 진정한 특징일지도 모른다.
30. 확실한 것은 의사소통이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세균류와 박테리아에서 버섯류와 식물에 이르기까지, 또한 꿀벌과 오징어에서 원숭이와 조류에 이르기까지 많은, 어쩌면 거의 대부분의 유기체가 같은 종의 다른 구성원들과 소통하는 모종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의사소통 체계는 정말로 믿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다. 하지만 우리가 특정 유기체를 확대해서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그 종의 모든 구성원은 그들의 유전자에 입력된 것과 사실상 똑같은 방식대로 의사소통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대조적으로 인간의 언어는 문화에 의해 형성된다. 덕분에 로라 브리지먼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모든 개인은 그들 공동체의 언어를 독특하게 변형한 자기만의 언어를 발전시킬 수 있다.
31. 왜 전 세계 언어는 대부분 열대 지방에 분포하는가? 행동과학자 대니얼 네틀은 이러한 패턴이 나타나는 이유가 열대 지방의 작물 재배 기간이 더 길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지역들에 사는 사람들은 더 많은 식량을 확보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더 자급자족적이다. 상대적으로 재배 기간이 짧은 온대와 한랭 지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흉작이 발생하기라도 하면 지리적으로 더 넓은 지역의 이웃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공동 언어를 갖는 것이 그러한 사회적 약속을 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32. 언어가 없다면 인간종 특유의 놀라운 문화적, 사회적 복잡성은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언어는 문화의 일반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언어는 지식의 축적과 저장, 전달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문화와 사회가 거의 모든 측면에서 폭발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그로 인해 한층 더 정밀한 전문지식, 규범, 합의가 가능해지고 결과적으로 노동, 거래, 신념체계, 헌법, 의례, 복잡한 법체계 간의 분업을 갖춘 방대하고 정교한 사회가 출현한다. 언어가 출현한 이래로 문화는 유전학과 함께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현재 그러한 변화 과정은 수학, 과학, 공학, 컴퓨터, 인터넷 등등에 의해 급격히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더해, 언어는 훨씬 더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 인간 정신 사이에 의사소통적 연결 고리를 제공함으로써, 언어는 우리의 집단 사고 능력을 근본적으로 확장한다.
33. 인간 삶의 거의 모든 분화된 영역에는 저마다의 고유한 어휘가 존재한다. 물리학이나 심리학, 식물학이든 자전거 수리나 회계, 점성술이든 우리가 어떤 분야에 익숙해지려면 엄청난 양의 ‘전문용어’에 숙달되어야 한다. 양성자, 크레브스 회로, 원뿌리, 전동장치, 복식부기, 황도 12궁 같은 용어는 그 단어, 그리고 그 단어와 연관된 많은 단어의 의미를 배우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감조차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전문용어와 전문 분야를 배우는 일은 대개는 수학을 배울 때와 비슷하다. 전문적인 언어는 우리가 전문 분야의 문제에 관해 사고하는 데 확실히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34. 세상을 쇄신하는 인간 문화의 급속한 진보는 어떤 한 개인이 가진 한정된 뇌의 힘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일이다. 언어가 존재하기에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 살아간 무수한 세대들이 쌓아온 통찰과 지금 이 순간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십억 사람의 마음속에서 들끓는 아이디어들을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언어는 우리를 연결한다. 언어가 있기에, 우리는 상대방으로부터 배울 수 있고 다툴 수 있으며 비판하고 검증할 수 있다. 또한 언어 덕분에 나쁜 생각은 꺾어버리고 좋은 생각은 북돋을 수 있다. 더욱이 언어는 문화와 사회의 발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추상적인 사고(수학, 과학, 기술, 법률을 비롯한 어떤 분야의 지식이든)를 뒷받침한다.
35. 현재의 컴퓨터가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려고 한다는 것은 자동차가 말의 생명 활동을 흉내 내려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동차가 말이 해온 유용한 일의 일부를 그나마 해낼 수 있는 것은 말의 복잡한 생명 활동을 전적으로 배제했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현재의 인공지능이 성공을 거두는 이유도 그것이 인간 지능의 복잡성을 완전히 배제해서다. 이는 인공지능이 거둔 성과를 깎아내리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인공지능은 자동차의 발명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자동차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사회를 바꿔놓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으로서는 기술적 특이점으로 인류가 절박한 실존적 위기에 처해 있다는 생각은 앞으로 자동차가 더 발전하게 되면 자동차끼리 무리를 지어 다니고 자유롭게 짝짓기하며 살아가고, 자동차 점프 챔피언의 우승자가 되기 위해 훈련에 돌입하게 되리라고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공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36. 물론 컴퓨터는 체스와 바둑을 비롯한 다른 많은 게임에서 인간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게임은 우리가 언어로 하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게임이다. 이 게임들에서 인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단순히 인공지능 시스템이 게임을 잘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인공지능은 게임을 하는 법 자체를 아예 알지 못한다. 인공지능이 게임을 할 수 있게 되지 않는 한, 인간 지능의 핵심인 언어적 즉흥 게임에서 인간에 필적하는 호적수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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