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거트너 지음, 정향 옮김
독서 기간 : 24.9.19 ~ 9.30
나의 한 줄 리뷰 : 벨 연구소로 풀어쓰는 통신의 근현대사와 기업의 자유롭고 혁신적인 연구소를 위한 길라잡이.
하이라이트
1. AT&T의 구원자는 시어도어 베일Theodore Vail이었다. 그는 밀리컨의 친구 프랭크 주잇이 입사하기 몇 년 전인 1907년에 AT&T의 사장이 되었다. 베일의 겉모습은 마치 금박 시대Gilded Age: 남북전쟁 이후의 대호황기의 임원을 나타낸 캐리커처 같았다. 통통하고 군턱이 졌고, 흰 팔자수염을 기르고 둥근 안경을 끼고 흰머리가 살짝 보이는, 위엄과 자신감에 가득 찬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한낱 전보 교환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베일은 매우 사려 깊은 사람이었고, 논쟁을 다각도에서 볼 줄 알았다. 또한 마음먹기에 따라 비판 세력을 누그러뜨릴 수도 있었고, 꾀로 이길 수도 있었다. 베일은 벨의 운영을 감독하면서, 높은 경쟁 비용으로 인해 전화 사업의 수익성이 과거보다 훨씬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베일이 첫 해에 기업 보고서에서 회사가 ‘비정상적인 부채’를 쌓아둔 상태임을 솔직하게 인정했을 정도였다. AT&T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업 이미지를 향상시키는 한편 효과적인 경쟁 전략을 수립해야 했다. 베일이 처음 취한 조치 중의 하나는 법정 싸움을 자제하고 그 분야에서의 전략을 재검토하는 것이었다. 그는 직원 1만 2,000명을 해고하고 프랭크 주잇이 일하던 뉴욕 사무실을 중심으로 시카고와 보스턴 등지에 흩어져 있던 공학 부서를 통합했다. 그런 한편으로는 중소 전화 회사를 짓밟지 않고 그들과 협력하기로 했다. 그는 독립 전화 회사들을 최대한 많이 인수하는 것이 AT&T를 위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정부가 이 전략을 우려하는 듯한 낌새를 보이자, 베일은 정부의 허가 없이 기업을 인수하지 않겠다는 데 동의했다. 또한 독립 전화 회사로부터 수수료를 받고 장거리 전화를 연결해주는 데에도 동의했다.
2. 베일이 보기에 AT&T의 부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또 다른 요소는, AT&T가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시스템 개선을 위해 끊임없이 일하는 기술 선도 기업으로 자리매김한 것이었다. 기업사학자인 루이스 갈람보스Louis Galambos가 훗날 지적한 바에 따르면, 베일의 전략이 진화함에 따라 AT&T의 임원진들은 가까운 훗날뿐만 아니라 아주 먼 훗날에도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상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벨 시스템 내부에서는 기술 혁신이 필요 없게 되는 날이 결코 오지 않으리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간단히 말해, 베일의 전략은 회사의 발전을 ‘몇 년 단위가 아니라 몇십 년 단위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베일은 또, ‘기술 선도자’라는 개념을 ‘넓은 사회적 시각’이라는 개념과 통합했다. 회사의 홍보 부서에서 기업 이미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창안한 표어를, 베일이 회사의 핵심 철학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매우 간단한 표어다. “하나의 정책, 하나의 시스템, 세계적인 서비스.”
3. 아널드는 시행착오를 거쳐 가장 좋은 재료와 오디언 관을 진공 상태로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다(그는 고진공 상태에서 오디언의 효율이 높아질 거라는 가설을 세웠는데, 그 가설은 맞았다). 아널드는 오디언 개량을 마친 후 필라델피아에서 주잇과 밀리컨을 만나, 오디언을 다른 중계기 아이디어들과 비교했다. 그리고 세 사람은 다양한 중계기를 통과한 전화 통화를 들어본 결과, 오디언이 월등히 낫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곧 진공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될 오디언과 그 후에 만들어진 것들은, 20세기 통신에 일대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새로운 진공관 중계기 몇 개를 전략적인 위치에 배치한 대륙 횡단 회선은 1915년으로 미뤄진 태평양 만국박람회에 맞춰 완공됐다. 해럴드 아널드가 개량한 중계기는 세 개의 전선이 만나는 받침대 위에 세 개의 극이 들어 있는 유리구가 여러 개 놓여 있는 모습이었다. 대륙 횡단 회선 자체는 네 가닥의 구리선(각 방향에 두 가닥씩)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AT&T의 전선공들이 13만 개의 나무 전봇대를 이용해서 대륙 끝에서 끝까지 연결했다. 자기가 설립한 회사에서 일상 업무를 하지 않은 지 오래된 발명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홍보를 위해 뉴욕에 앉아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옛 조수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에게 전화를 걸었다. “왓슨, 이리 와주게. 자네가 필요해.” 이제 늙은이가 된 벨이, 거의 40년 전에 보스턴에서 전화를 발명한 날 왓슨에게 했던 말을 흉내 내면서 말했다. “지금 거기까지 가려면 1주일이 걸릴 텐데요.” 왓슨이 대답했다.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AT&T에는 베일이 주창한 ‘세계적 서비스’라는 목표가 실제로 가능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4. 한편 프랭크 주잇은 대륙 횡단 회선 개통을 계기로, 자기 밑에 있는 젊은 과학자들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하여 그는 해럴드 아널드와 같은 사람들을 더 많이 고용하려 노력했다. 주잇은 밀리컨의 대학원생이었다가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간 하비 플레처에게도 계속 편지를 보냈다. 5년 동안 봄마다 AT&T에 와 달라고 정중하고도 설득력 있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마침내 1916년에, 플레처는 브리검 영 대학을 떠나 주잇 밑에서 일하기로 했다. 그동안 밀리컨도 계속 시카고 대학 졸업생들과 옛 친구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17년에는 기름방울 측정을 끝낸 머빈 켈리가 주잇에게서 2,100달러의 연봉을 제안받고 뉴욕행을 결심했다.
5. 웨스트 가에서는 엔지니어와 과학자를 구별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모두가 엔지니어로서, 미국을 연결하고 있던 전화 서비스를 개선하는 수천 가지 방법을 연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해럴드 아널드와 함께 연구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부서는 아널드가 대륙 횡단 전화 중계기 연구를 시작한 직후 설립돼, 그 후로 꾸준하면서도 서서히 성장했다. 프랭크 주잇과 존 J. 카티는 이 연구팀이 AT&T의 사업 전략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 젊은 과학자들은 대부분 밀리컨의 소개로 입사했으며, 시어도어 베일이 수립한 AT&T의 장기적 미래상을 완성해가는 존재들이었다. 즉, 동료 엔지니어들의 작업을 결정하는 일상적 문제(5년에서 10년 앞을 내다보기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를 뛰어넘어, 물리학과 화학에 관련된 근본적인 의문이 훗날 통신에 미칠 영향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과학적 연구는 미지 세계로의 도약이었다. 아널드는 나중에 이 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발명품이 값진 결과물이긴 했지만, 발명을 계획하거나 강제해서는 안 된다.” 이들 실험의 목적은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아널드의 요지는 일반적인 공학이 회사 운영에 도움이 되듯, 천재성도 회사 운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재성은 예측할 수가 없으므로, 알아서 발휘될 여지를 줘야 한다.
6. 마침내 미국 의회는 1921년의 윌리스 그레이엄 법령Willis Graham Act을 제정해서, 연방 독점금지법 적용 대상에서 전화 사업을 공식적으로 제외했다. 그때는 소위 ‘정당한 독점 사업’은 더욱 크게 성장해 있었다. 실제로 웨스트 가 본사의 공학 부서는 너무 비대해져 있었기 때문에, AT&T 임원진은 1924년 12월의 이사회에서 공학 부서를 반독립적인 회사로 분리시키기로 결정했다. 회사의 이름으로는 ‘벨 전화 연구소’라고 정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도 불분명하다. 「뉴욕 타임스」에 실린 연구소에 대한 짤막한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신생 회사는 전화 산업의 실험적 측면에 더욱 집중할 예정이라고 한다.” 바꿔 말하면, 벨 연구소의 연구가 전화 회사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 더욱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분리를 정당화한 것이다. 한편 프랭크 주잇이 개인적으로 남긴 메모를 보면, AT&T와 웨스턴 일렉트릭의 공학 부서가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어 불필요한 중복과 회계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두 회사를 보조하는 하나의 중앙 연구소를 설립해 AT&T의 효율을 높이려 한 것이었다.
7. 벨 연구소의 소장이 된 주잇은 거대한 작업실을 지휘하게 됐다. 산업 연구소가 연구 및 개발에 집중하는 것은 그리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독일의 대형 화학 및 제약 회사에서 반세기 전에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벨 연구소는 이 개념을 훨씬 더 큰 규모로 실현했다. 2,000명의 기술 전문가들 중에 대다수는 제품 개발을 담당했다. 클린턴 데이비슨Clinton Davisson과 머빈 켈리를 비롯한 약 300명의 직원은 해럴드 아널드 밑에서 기초 및 응용 연구를 담당했다. 아널드의 설명에 따르면, 그 부서는 물리화학 및 유기화학, 금속공학, 자기학, 전도, 방사능, 전자공학, 음향학, 음성학, 광학, 수학, 기계학 분야는 물론 생리학, 심리학, 기상학 분야까지 아우른다고 했다.
8. 벨 연구소가 설립된 지 몇 년 후에 미국 특허청이 새로 문을 열었을 때, 평소 장황하고 과장된 화법을 구사하던 프랭크 주잇은 다음과 같은 말로 벨 연구소의 본질을 표현했다. “산업 연구소란 창의력을 지닌 지성인이 모인 집단으로, 과학적 개념 및 방법론에 대한 지식을 익혔으며 자신이 몸담고 있는 특정 산업을 연구하고 개발하기 위한 설비와 비용을 제공받는 집단이다.” 그는 또 현대 산업 연구의 목표는 간단히 말해 일상의 ‘다반사’에 과학을 적용하는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산업 연구소는 맹목적인 반복 실험으로 인해 발생하는 실수를 대부분 예방할 수 있는 기관이다. 또한 개인의 지적 역량에 내재된 어떤 힘보다도 막대한 창의력을 당면한 문제에 쏟을 수 있는 기관이다.” 주잇의 장광설에는 명확한 선언이 숨겨져 있다. 벨 연구소는 그곳에서 일하는 과학자들이 좋은 아이디어를 찾는 일을 하고 있다는 통념에 반기를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켈리와 데이비슨 같은 사람들도, 좋은 아이디어는 널리고 널렸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사실 그들은 좋은 문제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9. 이 모든 사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벨 연구소가 신비롭고 낭만적인 과학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한편 항상 전화 회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연구소의 경영진은 과학자들이 회사와 관련된 껄끄러운 정치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경영진 스스로는 연구소가 기술, 정치, 경제에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를 알아야 했으며 항상 유념해야 했다. 회사가 번창하면(회사를 번창시키는 것이 머빈 켈리 같은 사람들의 주된 업무이기도 하다) 연구소도 번창하기 때문이다.
10. 시스템에는 개선할 곳이 많았고 따라서 많은 신제품이 필요했으며, 한편으로는 확실한 내구성도 보장돼야 했다. 따라서 참신한 제품이 있다 하더라도 그 제품의 내구성이 강한지, 그 제품으로 인해 개선될 점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야 했다. 그리고 웨스턴 일렉트릭에서 생산하는 제품들이 특정 사양과 품질을 충족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월터 슈하트Walter Shewhart라는 연구소의 수학자는 대량생산을 통계적으로 관리하는 기법을 창안하기도 했다. 이 기법은 곧 ‘품질관리Quality Control’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리게 된다. 이 기법은 그 후 몇십 년간 벨 시스템 내에서 제품 생산의 지침 역할을 했으며, 이윽고 전 세계의 산업 공정과 제품에도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11. 우리는 발명이 순식간에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발명가 혼자서 순간적으로 놀라운 깨달음을 얻어 ‘유레카’를 외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술적 도약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콕 집어 말할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처음에는 한 무리의 사람과 아이디어가 한데 모이면서 발명과 관련된 힘이 수렴되기 시작하고, 그 현상이 몇 달 또는 몇 년 또는 몇십 년에 걸쳐 점점 뚜렷해지고 빨라지면서 다른 아이디어와 관계자의 도움이 추가된다. 이때 운과 때도 중요하다. 알맞은 대답, 알맞은 사람, 알맞은 장소 또는 이 세 가지 모두가 알맞은 문제와 맞아 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야 때때로 도약이 이뤄진다. 이러한 도약은 나중에 뒤돌아봐야 비로소 뚜렷이 보인다.
12. 머빈 켈리는 그로부터 거의 1년 전에 29쪽 분량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벨 전화 연구소와 웨스턴 일렉트릭의 전후 문제에 관한 중대한 생각의 첫 번째 기록’이라는 제목의 글로, 1943년 5월에 버클리를 비롯한 연구소 임원들이 이 글을 회람했다. 켈리가 이 글을 쓴 목적은 전쟁이 끝난 후 회사에서 생산할 제품을 지정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급격히 성장할 것이 분명한 전자 산업에서 전쟁 후 재정비를 마친 벨 연구소가 차지할 자리에 대한 전망을 밝히고자 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10년 동안에 지난 30년 동안 일어난 변화보다 훨씬 중요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예상한다.” 켈리는 이렇게 내다봤다. 켈리는 덧붙여 말하기를 레이더로 인해 전파 및 마이크로파 기기 사업에 엄청난 기회의 문이 열렸다고 말했다. 또한 켈리는 통신 산업이 제품 면에서나 속성 면에서 라디오, 텔레비전 등의 자매 산업과 비슷해질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전쟁 전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벨 연구소는 전화 서비스의 특수한 속성과 문제에 적합한 장비를 연구하고 설계했다. 그러나 켈리는 코앞으로 다가온 시대에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긴 글의 중간쯤에서 켈리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보수적이고 비경쟁적인 조직이었다. 우리는 수명이 길고 유지비가 낮으며 안정적인 고품질 서비스 제공을 생산 및 설계 철학의 기본 요소로 여긴다. 그러나 우리의 기본 기술은 빠르게 변하며 경쟁이 심하고 활발히 성장하는 신생 산업의 기술과 점점 비슷해지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전자 분야에서 곧 혁신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켈리의 생각으로 벨 연구소는 혁신에 편승하는 게 아니라 혁신을 주도해야 했다.
13. 무려 410만 달러가 투입되었으니 새 건물이 평범한 연구소가 될 리는 없었다. 1930년대 후반 머레이힐 연구동은 그 자체가 하나의 R&D 프로젝트였다. 버클리, 켈리 및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설계 과정에서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로 인해 벨 연구소의 공간 부족 문제가 해결됐을 뿐 아니라 연구원들을 색다른 방식으로 조직해 추후에 대규모의 팀으로 확장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켈리, 버클리, 주잇은 벨 연구소가 곧 세계 최고의 연구 시설이 될 것이며, 이미 그렇게 됐다고도 생각했다. 1930년대 중반에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위한 아이디어 사냥차 미국과 유럽의 산업 연구소들을 돌아본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굳혔다. 그러니 새 연구소는 벨 연구소가 과학계에서 갖는 높은 위상과 학문적인 권위의 표상이어야 했다. 버클리의 말을 빌리면 ‘공장보다는 대학을 연상시키는’, 그러나 대학과는 작지만 뚜렷한 차이가 있어야 했다. 버클리는 주잇에게 “하지만 건물들이 각각 따로 떨어져 있는 대학 캠퍼스의 느낌을 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건물들을 서로 연결해서 부서 간에 고정돼 있는 지리적 구획을 없앴습니다. 서로 자유롭게 교류하고 긴밀하게 연락할 수 있게 말이죠.”라고 덧붙였다. 사실 물리학자, 화학자, 수학자들은 서로를 피해 다닐 운명이 아니다. 연구자들 역시 개발자들을 피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교류해야 할 운명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 연구소는 의도적으로 복도를 걷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 구조로 지어졌다.
14. 켈리가 새로 세운 시스템은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는 것이었다. 화학자, 물리학자, 야금학자, 엔지니어가 한 팀이 되었다. 또는 이론 과학자를 실험 과학자와 묶어 새로운 전자 기술을 연구하게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쇼클리와 같이 젊은 직원들을 관리직에 앉힌 그의 결정은 고령의 연구원들을 실망시켰다. 그럼에도 비교적 젊은 기술직 직원으로 전쟁 전 쇼클리의 주간 스터디에 참여했던 애디슨 화이트는 과학사학자인 후데슨에게 ‘켈리의 결정이 그의 입장을 고려해볼 때 깜짝 놀랄 만큼 뛰어난 경영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켈리는 지난 수십 년 간 함께 일한 사람들의 직함을 박탈하기도 했다. 애디슨은 이를 두고 경영자로서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는 “그때 그중 한 분은 제 사무실에서 우셨어요. 하지만 저는 부소장님의 결단이 연구소 혁신에 꼭 필요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지금까지도 켈리가 어떤 이유로 그런 행동을 취했는지를 충분히 설명해줄 만한 기록도 개인적인 글도 나오지 않았다. 당시에 그는 지금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뚜렷한 의도로 새로운 체계를 만들고자 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무언가 쓸모 있는 게 나올 것이란 느낌만으로 움직인 것일까? 그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한 팀으로 묶으면 놀라운 발견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조직 재편은 거센 혁명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문건은 단 하나만 남아 있다. 이 문건은 새로 꾸린 팀들에 대한 자금 지원 승인서로, 켈리 자신이 사인한 것이었다.
15. 벨 연구소 연구진 중에서도 특히 잭 스캐프Jack Scaff, 헨리 토이러Henry Theurer, 러셀 올Russell Ohl이 30년대 후반 실리콘 연구에 매진했는데, 실리콘이 라디오 송수신 관련 분야 연구에 있어 큰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스캐프와 토이러는 폴리실리콘 분말을 유럽에 주문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듀퐁과 같은 미국 기업에서 받은 다음 석영 도가니에서 초고열로 녹였다. 이 실리콘은 실험 및 관찰을 위해 다시 작은 잉곳ingot: 결정성 덩어리 상태로 응고됐다. 석탄처럼 새까만 덩어리인 실리콘 잉곳은 너무 빠르게 식으면 여기저기 틈이 벌어진다. 이 잉곳들 중 일부는 전류를 한 방향으로만 흐르게 했다. 반면 그 반대 방향으로 전류를 흐르게 하는 잉곳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러셀 올이 두 가지를 모두 하는, 즉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전류 방향이 반대인 샘플을 찾았다. 이 잉곳은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올이 이 잉곳에 빛을 쪼였더니 놀랄 만큼 큰 전압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신기한 현상이었다. 결국 어느 오후 올은 머빈 켈리의 사무실에 불려 가서 직접 시연을 했다. 이 놀라운 현상을 본 켈리는 바로 월터 브래튼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하지만 올, 켈리, 브래튼 세 사람 모두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속 시원히 설명하지 못했다. 야금학자였던 스캐프는 후일 “올과 저는 이 수수께끼들을 풀려면 우선 이들에 걸맞은 이름을 붙여줘야겠다고 생각했죠.”라고 이야기했다. 올과 스캐프는 전화 통화로 이 두 종류의 실리콘을 p형positive 실리콘과 n형negative 실리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16. 보다 중요한 깨달음의 시작이었다. 가령 인과 같은 특정 원소가 실리콘에 더해지면 실리콘 원자의 최외각궤도에 전자가 남는다. 그리고 이 잉여 전자excess electron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실리콘에 전류가 흐르게 되는(구리와 같은 도체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동일) 것이다. 야금학자 스캐프와 올은 이 점에 생각이 일치했다. 이것이 n형 실리콘이다. 이와는 다르게 붕소와 같은 원소들이 실리콘에 더해지면 최외각궤도에 전자를 더 받아들일 수 있는 텅 빈 공간, 즉 정공hole이 생긴다. 이 정공들 역시 잉여 전자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며 전류를 운반할 수 있었다. 이는 마치 액체 속을 떠다니며 공기를 옮기는 공기 방울들과도 비슷했다. 이것이 p형 실리콘이다. 스캐프와 토이러, 결국 벨 연구소 고체 물리 연구진 모두가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데에는 반도체의 순도가 중요하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동시에 잘 통제된 불순물 역시 필요 불가결했다. 훅 불면 날아갈 정도로 적은 양의 불순물이 실리콘에 유입된다고 해보자. 즉, 실리콘처럼 순수한 반도체 물질 원자 500만 개, 1,000만 개 사이에 붕소나 인 원자가 하나 슬쩍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이 반도체가 전류를 전달할 수 있을지, 얼마나 잘 전달할 수 있을지를 결정했다. 간단히 말해 벨 연구소에서 때로 사용하던 용어를 빌자면 ‘기능성 불순물’이었다.
17. 브래튼은 화살촉 양 끄트머리 점들을 각각 전선으로 이어서 배터리에 연결시켰다. 이로써 간단한 회로를 하나 만든 것이었다. 연구진은 반도체 물질(p형, n형 게르마늄 및 실리콘), 점(다양하게 간격을 줌), 화학물질 구성, 전해질 용액 등에 변화를 줘가며 2주 간 다양한 설정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설정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사실이 발견됐고 조금씩 증폭 효과가 달라졌다. 그리고 12월 16일 아침 브래튼은 마침내 정답을 발견했다. 나중에 브래튼이 말한 것처럼 딱 맞게 살짝 건드려서 두 개의 금점이 게르마늄 조각에 접촉하게 되면 놀라운 증폭 효과가 있었다. 이 순간 장치 내에서는 점을 타고 흘러들어온 전류와 금속 내의 불순물이 서로 반응했고, 이로 인해 발생한 전자와 정공들이 떠 다녔다. 엄청나게 복잡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브래튼과 바딘조차 이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증폭작용 그 자체였다. 수년 후, 고체 증폭기가 어떻게 세상에 태어나게 됐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쇼클리는 브래튼의 예전 노트들을 샅샅이 훑었다. 쇼클리는 브래튼의 노력이 진정한 결실을 맺은 것은 바로 12월 16일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바로 그날 전기신호의 뚜렷한 증폭이 관찰된 것이다.
18. 벨 연구소의 엔지니어들은 단어 끝에 ‘-이스터-istor’를 붙이길 좋아했다. 배리스터varistor: 반도체 저항 소자나 서미스터thermistor: 온도에 따라 전기저항치가 달라지는 반도체 회로 소자라는 이름의 소형 장치들은 이미 통신시스템의 전기회로망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메모에는 ‘트랜지스터’라는 이름은 ‘상호 전도도trans-conductance: 진공관의 증폭률을 양극 저항의 값으로 나눈 것’ 또는 ‘전송하다transfer’라는 단어와 ‘배리스터varistor: 반도체 저항 소자’라는 단어를 합친 것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었다. 다른 이름들 역시 연구소 핵심 간부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었다. 아이오테트론에 대해서는 ‘미세한 요소라는 뉘앙스를 충분히 전달’한다는 설명이, 반도체 삼극진공관에 대해서는 조금 길고 복잡하긴 해도 ‘꽤 괜찮은 이름’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하지만 역시 뚜껑을 열어보니 트랜지스터가 의심할 바 없는 일등이었다. 이제 마지막 단계로 트랜지스터란 이름이 붙은 이 장치에 대해 낱낱이 파고들 필요가 있었다. 연구부장 바운은 “각 부서마다 가장 뛰어난 전자 엔지니어들을 불러 다양한 각도에서 트랜지스터를 연구하고, 증폭기로서 어떤 기능이 가능한지 실험했죠.”라고 회상했다. 게르마늄에 첨가된 미량의 불순물 덕에 마치 진공관 같은 증폭 기능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전압이 걸렸을 때 어떻게 전공과 전자들이 반도체 판 안을 돌아다닐 수 있는가를 알려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했다. 1948년 5월 초, 트랜지스터에는 ‘벨 전화 연구소 공식 기밀 기술’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말하자면 ‘벨 연구소 특급 기밀’로 지정된 것이었다. 랠프 바운은 트랜지스터에 대해 아는 이들에게 장문의 회람을 돌려 비밀 엄수를 당부했다. 더불어 트랜지스터 연구 및 그와 관련된 모든 것에 ‘표면 상태 현상’이라는 코드네임이 주어졌다.
19.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두 기술인 원자폭탄과 트랜지스터는 거의 삼 년의 간격을 두고 공개됐다.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뉴멕시코 주 사막에 위치한 트리니티에서 원자폭탄 실험이 시행됐다. 이 실험은 새로운 물질들이 갖고 있는 힘과 이에 따른 공포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야구공 크기로 제련된 금속, 정확히 말하면 당시 새롭게 발견된 원소인 우라늄 약 5킬로그램이 중간 크기의 도시 하나를 날릴 수 있었던 것이다. 트랜지스터 역시 미량의 불순물이 첨가된, 1그램이 채 되지 않는 게르마늄으로 새로운 물질들의 힘을 드러냈지만, 그 중요성은 훨씬 미약해 보였다. 1948년 6월 30일, 맨해튼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열린 작은 행사에서 트랜지스터가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진공관의 대체물이라는 뻔한 소개말과 함께였다. 진공관보다 작고 울퉁불퉁하며 전력을 적게 소비하는 트랜지스터는 종종 수도꼭지에 비교됐다. 물 대신 전기를 껐다 켰다 했고, 전기를 세차게 흘려보낼 수도 있었다. 손잡이를 살짝 돌려주면 큰 증폭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었다.
20. 하지만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벨 연구소의 과학자들의 기가 죽지는 않았다. 대중은 무관심했지만 전자 업계 내에서는 열광적인 반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대중 앞에서의 시연 후 업체 임원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 프레젠테이션이 있었다. 그 뒤 바운을 비롯하여 켈리, 버클리, 쇼클리, 바딘, 브래튼, 이 고체 물리 연구 프로젝트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이들을 수신인으로 한 편지들이 전자 업계 전 분야의 임원들로부터 속속들이 날아들어 왔다. 진지하고도 넉살 좋은 투로 트랜지스터 샘플을 요청하는 편지들이었다.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 1919년부터 1986년까지 존재한 전자 회사, 모토로라,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를 비롯하여 수많은 라디오 및 텔레비전 생산 업체들이 샘플을 얻고자 했다. 벨 연구소의 발표는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아서 하버드, 퍼듀, 스탠포드, 코넬 및 수많은 대학들이 연구소에서 쓸 샘플을 요청했다. MIT의 전자공학부 부장이었던 제이 포레스터Jay Forrester는 1948년 바운에게 보낸 서한에 “트랜지스터가 전자 컴퓨터 회로에서 중요하게 쓰일 듯합니다. 고속 디지털 컴퓨터에서 트랜지스터가 어떻게 사용될지 연구하려 하는데 트랜지스터 샘플이 있으시면 몇 개 부탁드립니다.”라고 썼다. 바운이나 쇼클리, 켈리가 트랜지스터가 컴퓨터 내의 논리 회로에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까를 고려했는지는 알 수 없다(당시 진공관은 컴퓨터 논리회로에 이미 쓰이고 있었지만, 어마어마한 에너지 소비량과 잘 깨지는 속성 탓에 절반의 성공일 뿐이었다). 하지만 제이 포레스터가 보낸 서신은 트랜지스터가 컴퓨터 회로에서도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바운은 즉시 “트랜지스터가 컴퓨터에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니 흥미롭습니다.”라고 회신을 보냈다.
21. 프레스drill press: 누르는 힘을 이용하여 일정한 모양을 찍어내는 판금 기계같이 생긴 장치를 설계해 대형 게르마늄 단결정을 만드는 법을 고안했다. 틸은 순수한 게르마늄 ‘씨앗’을 용융된 게르마늄에 살짝 담갔다가 천천히 부드럽게 끄집어내면 대형 게르마늄 단결정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단결정을 얇게 절단해 사용하면 점접촉 트랜지스터의 성능이 향상될 것이었다. 틸의 상관들은 그의 아이디어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오후 5시부터 새벽 3시까지 벨 연구소에 남았다. 그러고는 빌린 연구실에서 빌린 장비들로 비밀리에 작업을 진행했다. 결국에는 틸의 방법이 효과가 있다는 것이 증명돼 모턴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단결정 게르마늄 생산의 성과 덕분에 틸과 동료인 모건 스파크스Morgan Sparks가 접합 트랜지스터용 단결정도 만들라는 허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쇼클리가 시카고의 어느 호텔 방에서 늦은 밤 끄적인 낙서에서 비롯돼, 이미 수년 전 이론적 근거를 갖고 그 실현이 예견된 장치인 접합 트랜지스터. 나중에 쇼클리는 이 두 명의 야금학자들이 제조한 물질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시키는 데 빠져 있었던 ‘결정적인 재료’였다는 것을 시인했다.
22. 그 방에서 브래튼은 벨 연구소, 그리고 켈리가 소식통으로 삼고 있던 쇼클리에 대해 실망한 부분들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몇몇 불만 사항에 놀라긴 했지만 켈리는 일단 강하게 되받아쳤다. “까다로운 상대였죠. 부소장님은 제가 제기한 불만들에 하나하나 철저하게 반박하셨어요.” 브래튼은 존경심까지 담아 그날을 회상했다. 하지만 브래튼이 쇼클리가 접합 트랜지스터를 정확히 언제 발명했는지 알고 있다고 말하자 켈리의 말투가 달라졌다. 즉, 브래튼은 쇼클리가 자신들보다 트랜지스터를 훨씬 더 늦게 발명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것을 가지고 쇼클리의 트랜지스터 특허 출원건을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을 켈리에게 비친 것이었다. 특허 싸움까지 가게 된다면, 쇼클리의 트랜지스터가 자신들의 발명에 자극을 받아 발명됐다는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날 이후에 켈리는 브래튼에게 벨 연구소 내에서 거의 완벽한 자유를 보장해줬다. 브래튼은 더 이상 트랜지스터 연구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이제 자신이 관리자로 인정하지 않는 쇼클리에게 어떤 보고도 올릴 필요가 없었다. 결국 고체 물리 연구팀에는 쇼클리라는 인간 말종이 있었던 셈이었다.
23. 1937년 여름, 섀넌은 MIT 케임브리지 캠퍼스를 떠나 몇 달 간 웨스트 가에 있는 벨 연구소에서 일하게 됐다. 그곳에서 그는 어떻게 하면 릴레이와 스위치 개폐, 회로에 불 대수학을 활용할 수 있을까를 계속 궁리했다. 그가 벨 연구소에서 여름방학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것은 우연치고는 행운이었다. 당시 전 세계를 통틀어 전기신호 연구를 하기에 벨 연구소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다. 릴레이는 벨 연구소 교환switching 연구의 뼈대를 이루는 개념이었다. MIT로 돌아온 섀넌은 베네바 부시의 추천을 받아 자신이 얻은 영감을 논문으로 작성했다. 부시는 “저는 원래 칭찬을 잘 안 하는 편인데, 그 논문은 정말 최고였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칭찬이 부시 자신에게는 예외적이었을지라도, 섀넌의 논문에 대한 학계의 호평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섀넌은 컴퓨터 회로를 잘 설계하면 힘들게 수고를 기울이지 않아도 효율적으로 수학 공식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였다. 1939년 섀넌은 이 논문으로 공학 부문에서 유명한 상을 수상했다. 그는 부시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상 소식을 통보받고 매우 놀랍고도 기뻐서 기절할 뻔했답니다!”라고 썼다.
24. 섀넌은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1939년 초 베네바 부시에게 보낸 편지에서 섀넌은 어느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정보’가 움직이는 통신과 그 방법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음을 넌지시 비췄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그가 젊은 시절 내내 생각한 주제였다. 섀넌은 어린 시절 신문 배달 일을 했고 웨스턴 유니언Western Union: 미국의 송금 서비스 전문 업체에서 전보를 배달했으며, 길가 울타리를 이용해서 친구 집까지 전보를 보내기 위한 전선을 가설한 적도 있었다. 미시간 대학 재학 시절에 그는 벨 연구소 엔지니어인 랠프 하틀리Ralph Hartley가 쓴 ‘정보의 전송’이란 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송신기에서 수신기로 보내지는 정보의 속도와 흐름을 가늠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글이었다. 섀넌은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전보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매체가 공유하는 보다 근본적인 특성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부시에게 보낸 편지에서 섀넌은 수년 전 하틀리가 제안한 내용을 넘어선 것을 글에 담지는 않았다. 하지만 섀넌은 자신에게 적절한 환경과 시간만 주어진다면, 메시지 및 통신 전반을 아우르는 이론을 구축할 수 있을 거라고 암시했다.
25. 프라이는 1925년 웨스턴 일렉트릭을 떠나 새로 생긴 벨 연구소로 옮겼다. 그는 1930년쯤 수학자들의 모임이 비로소 정식 부서로 승격됐고, 여러 수학자들이 새로 합류했다고 말했다. 본래 의도대로 프라이의 수학부는 연구를 하기 위한 부서가 아니었다. 수학부는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연구소의 엔지니어들과 물리학자들, 화학자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기관이었다. 프라이는 “당시 엔지니어들은 하나같이 안쓰러울 정도로 수학에 무지했죠. 그래서 누구든 제대로 계산을 할 수 있다거나 수학 이론을 읊을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이 틀렸을지라도 존경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수학자는 마치 수녀 같은 존재였어요. 저절로 존경심이 생기는 거죠. 다른 이들과는 다르니까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프라이 아래에 있던 수학자(남자일수도 여자일수도 있었다. 당시 수학부에는 여자수학자도 몇 명 있었다)들은 거의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관리직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관심사를 추구하는 것이 가능했다. 혹은 다른 학문 분야에서 생긴 의문점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여기에는 이론 물리학자들의 고민거리이자 웨스턴 일렉트릭에서 생산에 들어가기 위해 벨 연구소에서 준비 중이던 장치와 관련된 문제도 있었다. 이전에 수학부장이었던 헨리 폴락Henry Pollak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그들은 다들 저처럼 전문 수학 분야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저 흥미로운 문제를 거절하지 못했을 뿐이에요. 재미있는 게 생기면 하던 일도 제쳐놓고 문제를 즐겼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들이 하는 일에 끼어드는 거였으니까요.”
26. 섀넌은 비밀 통신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114쪽 길이의 명저 『암호학에 대한 수학적 이론A Mathematical Theory of Cryptography』에 담았는데, 1945년에 저술을 끝마쳤다. 이 글은 대중에게 공개되기에는 매우 민감한 주제였기 때문에 즉각 기밀문서로 분류됐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이들에게 이 글은 다양한 비밀 보호 체계의 역사와 방법론에 대한 한 편의 긴 논문과도 같았다. 또한 어떤 방법을 쓰면 보안이 뚫리지 않는지(섀넌은 이를 ‘이상적’이라고 칭했다), 절대 풀 수 없는 암호 체계라는 것이 매우 복잡하거나 다루기 힘들어 보인다면 현실적으로 가장 효과가 뛰어난 암호 체계는 무엇인지에 대해 설득력 있는 분석이 펼쳐졌다. 열람 허가를 얻었던 소수에게 그의 수학적 논증은 유익한 영감을 제공해줬다. 또한 언어, 특히 영어가 불필요한 중복으로 가득하며 암호의 뜻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27. 1940년대 초에 그가 집에서 진행하던 연구는 1947년 마침내 길고도 명쾌한 한 편의 논문으로 완성됐다. 1948년 7월, 남부 맨해튼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트랜지스터가 공개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벨 시스템 기술」에 이 논문의 첫 부분이 실렸다. 그 뒷부분은 10월호에 마저 실렸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이 ‘정보 시대의 대헌장’이라 칭했던 섀넌의 「통신에 대한 수학적 이론A Mathematical Theory of Communication」은 특정한 하나의 주제가 아닌 일반적인 법칙과 통합적인 아이디어들에 관한 것이었다. 섀넌의 동료 브록 맥밀란Brock McMillan은 “섀넌은 항상 깊이 있고 근본적인 관계를 연구했죠.”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 섀넌은 마침내 그러한 관계들을 밝혀낸 것이었다. 섀넌은 후에 이 논문이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들 중 하나가 “물질 덩어리나 에너지처럼 정보도 물리적 질량을 갖는 존재처럼 다룰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좀 더 현실적으로 봤을 때, 그는 벨 연구소의 엔지니어들을 오랫동안 괴롭혀온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했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가? “통신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곳에서 선정된 메시지를 다른 곳에서 정확하거나 거의 정확한 수준 정도로 재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라고 섀넌은 논했다. 아주 당연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섀넌은 이 문제가 왜 심오한지 설명했다. 벨 연구소가 여전히 ‘보편적 연결성universal connectivity’을 추구하고, 미래의 통신시스템이 켈리의 말처럼 ‘인간의 두뇌와 신경계처럼 생물체의 체계’와 비슷해진다면 이러한 꿈의 실현은 트랜지스터 같은 신기술, 즉 하드웨어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에 더해 섀넌 자신이 해온 것처럼 엔지니어들에게 수학적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했다.
28. 섀넌이 하고 싶은 말은, 그가 수학적으로도 증명해 보였듯이 어떤 메시지를 의도한 곳까지 분명하고 안정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메시지가 담고 있는 정보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는 공학에 있어서 메시지의 의미적 요소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썼다. 달리 말하면 메시지가 담고 있는 정보를 의미의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보를 사용하여 메시지의 불확실성을 줄일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정보는 메시지 수신자에게 이전엔 몰랐고 예측할 수 없었으며 불필요하지 않은 무엇인가를 제공한다.
29. 섀넌은 어떤 메시지의 정보 함유량과 메시지 내 정보 비율을 측정하는 데 있어서 단위를 사용하면 매우 도움이 될 것이고, 이 단위를 ‘비트bit’라고 부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비트라는 단어가 이 의미로 사용돼 출판물에 실린 적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섀넌은 벨 연구소 수학부 동료인 존 터키John Tukey가 ‘2진 숫자binary digit: 0과 1의 두 가지’라는 말을 ‘비트’라고 줄여 부르는 것을 듣고 이를 따왔다. 섀넌은 비트가 “같은 수준의 개연성을 지닌 두 가능성 중 하나가 선택되는 순간 생성되는 정보와 대응한다. 만약 동전을 던졌는데, 내가 당신에게 앞면이 나왔다고 말한다면, 이는 내가 이 사건에 대하여 1비트의 정보를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모든 의사소통은 정보의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2)모든 정보는 비트를 단위로 가진다. (3)측정 가능한 비트로 구성된 정보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고, 또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옳다.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대수롭지 않은 이 명제들은 막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큰 놀라움이었다. 이를 두고 섀넌의 한 동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았다고 말했다. 섀넌이 말하고자 한 것은 결국 모든 정보는 적어도 누군가가 그것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려고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 정보가 전화이거나 마이크로파 송수신, 혹은 텔레비전 신호라는 점은 상관없었다.
30. 물론 이 두 가지 의견, 즉 발명에 개인이 중요한지 혹은 그룹이 중요한지는 상호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아이디어는 개인에게서 나오며, 이 아이디어 및 발명에 대한 책임은 그룹 또는 다수의 그룹으로 귀속된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이동하는 과정은 상당히 논리적으로 진행된다. 연구부에서 동료들과 함께 과학적 이해를 추구하는 기초 학자가 낸 아이디어가, 개발부에서 팀과 함께 일하는 응용 학자로 넘어갔다가 마지막으로 웨스턴 일렉트릭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엔지니어팀으로 넘어가는 식이었다. 또한 좋은 환경이 뒷받침되는 경우, 그룹이나 현명한 동료는 어떤 개인에게 영감을 줄 수도 있었다. 섀넌이 과학자로서 한창일 때, 벨 연구소의 특허부는 왜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특허를 내는지, 어떤 원칙이 있는지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딱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특허를 제일 많이 낸 직원들은 벨 연구소 전기 엔지니어인 해리 나이퀴스트Harry Nyquist와 아침이나 점심 식사를 많이 한 사람들이었다. 나이퀴스트가 그들에게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사람들을 불러내서 무언가 생각하도록 만들었죠.”라고 한 과학자가 회상했다. 무엇보다도 나이퀴스트가 던진 질문이 좋았던 것이다. 섀넌도 나이퀴스트를 알고 있었다. 섀넌은 혼자 일했지만 그럼에도 후에 한 인터뷰에서 벨 연구소의 지적 환경이나 사람들, 자유로운 분위기 등과 벨 시스템의 소소한 기술적 문제들은 그의 정보이론에 꽤 큰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31. 진실로 새롭고 널리 사용될 기술을 개발하는 일은 언제나 실패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켈리는 연구부 사람들이 수년 동안이나 구체적인 목표가 없더라도 마음 가는 대로 어슬렁댈 수 있도록 놔뒀다. 그는 연구가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더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과학자로서 첫 발을 내디뎠을 때 켈리는 밀리컨의 연구실에서 기름방울을 세었고 동작이 느리고 유령만큼이나 호리호리한 클린턴 데이비슨과 웨스트 가 사무실을 함께 쓰기도 했다. 이렇게 켈리 자신은 평생 동안 새로운 것들을 실시간으로 배웠고, 그런 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힘겨운지 직접 겪어야 했다. 그러니 어떻게 한 사람이 매년마다 정말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겠는가?
32. 켈리는 창의적인 기술을 연구하는 기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쇼클리나 섀넌 같은 최고의 인재들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수긍하곤 했다. 그냥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시 벨 연구소 사람들이 늘 얘기하곤 했던 것처럼(원자물리학에서 따온 캐치프레이즈였다) 아주 많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각 부서에서 강력한 아이디어들을 배양할 수 있는 ‘임계질량’이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이에 더해 창의적 기술 연구 기관은 아직 이룬 것은 많지 않지만 전도유망한 직원들의 능력 배양에도 힘써야 했다. 이는 이타적 목적에서가 아니었다. 산업 과학 기술이 매우 복잡하게 진화했기 때문에 이제는 미국 대학원을 뛰어넘는 수준의 훈련을 받은 인재들이 필요했던 탓이었다. 1948년 벨 연구소에서는 학점을 제공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대학원 수준의 사내 교육 프로그램을 신설했는데, 이를 통신 개발 훈련 프로그램Communications Development Training program 혹은 CDT라고 불렀다. 하지만 벨 연구소의 누구도 CDT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켈리 부소장은 언짢았겠지만, 이 프로그램은 비공식적으로 ‘켈리 대학’이라고 불렸다. 창의적 기술 연구 기관은 임계질량 확보, 그러니까 연구진들을 서로 가까이 둬 아이디어를 서로 나눌 수 있어야 했다. 또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도구를 제공해야 했다. 이 도구들에는 비싼 기기나 연구소용 용광로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이 필요했다.
33. 창의적 기술 연구 기관에는 안정적인 자본 유입 역시 중요했다. 물리학자 필 앤더슨이 “자금의 중요성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한 대로였다. 다행히 벨 연구소는 지역 전화 업체 및 AT&T, 웨스턴 일렉트릭의 전폭적인 지원 덕에 충분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벨 연구소는 단기적 계획 수립뿐 아니라 5년, 10년, 아니 20년 후의 먼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가능했다. 창의적 기술 연구 기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제품에 대한 시장을 확보하는 일이다. 벨 연구소의 경우 전화 사용자들인 일반 고객 및 제조업체인 웨스턴 일렉트릭을 모두 확보하고 있었다. 신품 개발이 아닌 순수 과학 연구를 추구하는 연구진들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성과가 제품에 적용된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에 대한 인식이 그들의 연구에 있어 상당히 효과적인 동기부여가 됐다. 응용과학의 영역에서 연구한다는 것 역시 긍정적이어서 몇 년 후 한 벨 연구소 연구원은 “응용과학은 천재성의 싹을 짓밟지 않습니다. 인간의 사고 과정에 초점을 맞추니까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켈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새로운 기기나 발명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다른 기기나 발명이 필요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발명이 발명을 부르는 셈이죠.” 전화의 발명이 교환 및 송수신 분야의 셀 수 없는 발명을 불러온 것처럼 트랜지스터의 발명은 교환, 송수신, 컴퓨터 분야에서 이보다 훨씬 많은 발명의 촉매제로 작용했다. 즉, 하나의 기술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예외 없이 또 다른 해결책이 필요한 문제들을 야기했다. 따라서 진실로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건, 조만간 또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거라는 것을 의미했다.
34. 연구소 기술자인 에릭 뷸러Eric Buehler의 도움을 받아 몇 달 간 작업한 끝에 타넨바움은 용해된 실리콘에 실리콘 결정을 담갔다 끌어올리는 속도를 다르게 하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기다란 실리콘 봉을 만들었다. 끌어올리는 속도에 변화를 주면 실리콘 결정에 유입되는 n형 및 p형 불순물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 기다란 실리콘 결정은 11.5센티미터의 길이에 폭은 1.9센티미터 정도였는데, n-p-n 샌드위치들이 다닥다닥 쌓아 올려져 있어서 마치 작은 회색 웨이퍼들로 만들어진 얇은 막대기 같았다. 1954년 1월, 이 결정에서 n-p-n 웨이퍼를 하나 절단한 타넨바움과 뷸러 두 사람은 세계 최초로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몇 달 후, 벨 연구소에서 게르마늄 결정 생성 방법을 처음으로 고안한 뒤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exas Instruments’라는 작은 반도체 기업에 몸담고 있던 야금학자 고든 틸 역시 자신의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공개했다. 하지만 이 두 경우 모두 아직 축하받을 만한 단계는 아니었다. 우선 뷸러와 타넨바움의 실리콘 트랜지스터는 제작 방식이 너무 복잡해서 대량생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업계 전반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안정적이고 만들기 쉬운 실리콘 트랜지스터가 필요했다.
35. 타넨바움은 연구소 노트에 ‘직접적인 방식을 시도해볼 것’이라고 적은 대로 알루미늄 전선을 녹여 반도체의 가장 위층을 뚫어버렸고, 전기 접촉이 발생했다. 1955년 3월 17일 늦은 저녁이었다. 계측기를 확인한 타넨바움은 이 실리콘 트랜지스터가 기존의 어떤 게르마늄 트랜지스터보다도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는 것을 확인하고 놀랐다. 그는 노트에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트랜지스터다. 틀림없이 생산도 쉬울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 트랜지스터는 대량생산에 꼭 맞을 거란 걸 바로 알았죠.”라고 타넨바움은 말했다. 그는 이 사실을 아내에게 알리기 위해 정신없이 집으로 차를 몰았다. 혹시 전부 꿈이었나 싶어 밤새 한숨도 못 잔 그는 아침에 서둘러 연구실로 돌아가 다시 실험을 했다. 곧 주임들이 전부 소집됐다. 그중에는 원자력 위원회에서 돌아와 벨 연구소 연구부 부장을 맡고 있었던 짐 피스크도 있었다. 당시 유럽에 있었던 잭 모턴도 소식을 듣고는 일정을 앞당겨 돌아왔다. 트랜지스터 개발 공정에서 모턴의 의견은 벨 연구소의 최종 결정과도 같았다. 모턴은 이번 성공이 갖는 가치를 즉각 이해했다. 경영에 바쁜 켈리는 모턴이 고려한 기술적 측면을 제대로 분석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으므로 이런 류의 결정은 모두 모턴의 의견을 따랐다. 모턴과 켈리는 확산 실리콘 트랜지스터 문제에 있어 한 배를 탄 사람들이었다. 이제 미래의 트랜지스터는 모두 실리콘으로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36. 통화를 전달하는 전파인 아날로그 신호들은 매우 약했다. “음향을 멀리 보내려면 증폭기 50개는 거쳐야 합니다.”라는 게 매슈스의 설명이다. 대서양 횡단 해저 케이블의 방식이 이것이었다. “경로 상에 있는 증폭기들이 전부 하나의 주체에 의해 설계되고 관리되는 게 좋습니다. 이것이 AT&T인 거죠. 그러면 자연스럽게 독점이 형성됩니다. 아날로그 시스템에 수십 개의 업체들이 관여하면 작동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섀넌은 메시지가 정보에 의해 분류되고, 정보는 다시 디지털 코드화될 수 있다고 단언했다. 이는 독점 상태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암시했다. 섀넌이 제안한 디지털 정보는 내구성도 있었고 이동이 쉬웠다. 곧 어떤 회사라도 메시지를 디지털 코드화해 전송할 수 있게 될 터였다. 코드를 푸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해가 지날수록 이 과정은 쉬워질 것이었다. 디지털 전송에 필수적이면서도 가격이 저렴한 트랜지스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슈스는 섀넌의 정리가 “벨 시스템의 해체에 수학적 기반이 됐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맞다면, 쇼클리의 연구는 벨 시스템 해체에 기술적 기반이었다. 이제 누구든지 트랜지스터 특허에 대한 라이선스를 받을 수 있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따라, 켈리가 도출한 혁신의 공식으로 인해 누군가는 덕을 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뒤돌아보면 벨 연구소의 위대한 성공은 그 몰락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37. 텔스타는 직경 90센티미터 정도로 피구공보다 조금 컸고, 무게는 77킬로그램으로 무거운 성인 남자 정도였다. 뉴저지 힐사이드의 연구실에서 조립된 텔스타는 뉴저지 주 윕패니에 있는 벨 연구소와 머레이힐 기지에서 테스트를 거친 후 플로리다 주 케이프 커네버럴로 옮겨졌다. 그곳에서는 1962년 6월 둘째 주 발사를 앞두고 델타-토르 로켓이 기다리고 있었다. 텔스타는 구 모양이기는 했지만 그 표면은 72개의 면으로 나뉘어져 마치 희한한 모양의 거대한 보석 같았다. 결과적으로 텔스타는 피어스가 주장했던 “혁신은 시기를 잘 맞춰야 일어난다.”는 말의 좋은 예가 되었다. 텔스타는 발명품 하나가 아니라, 지난 25년 간 연구소에서 개발한 16가지 기술이 합쳐진 결과물이었다. 「뉴욕 타임스」에서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텔스타에 쓰인 기술 중에 우주에 보내려고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이 기술들이 모두 모였을 때야 비로소 능동위성의 전개가 가능했던 것이다.
38. 베이커는 1930년 말에 연구소에 왔는데 쇼클리, 섀넌, 피어스, 피스크를 포함한 미래의 인기 지식인들도 거의 동시에 연구소로 들어왔다. 동료들은 때로 이 젊은이들을 급진파라고 불렀다. 이후 베이커가 「뉴요커」에서 했던 인터뷰에 따르면, 급진파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과학계의 근본적이고 어려운 질문들을 공략하는 것이 여기서는 가능하다는 데에 흥미를 느껴 벨 연구소로 온 이들’이었다. 당시 베이커는 그런 연구는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이뤄질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쇼클리와 피어스는 벨 연구소의 재원을 ‘더 깊은, 하지만 동시에 인간사와 긴밀하게 결합되는, 그런 새로운 종류의 과학’을 만드는 데에 사용했다. 베이커가 보기에 급진파는 학계 최고의 과학과 현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주요한 응용 사이를 그 어느 때보다도 좁히고 있었다.
39. 킬비나 노이스 역시 개인용 컴퓨터나 휴대전화, 심우주 탐사 등 존 피어스가 메모나 에세이에 썼던 것과 같은 미래의 모습이 암시하는 전체 그림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몇 년 안에 집적회로는 벨 연구소의 신기술을 대표했다. 고체 전자공학의 엄청나게 중요한 발전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비록 연구소의 과학적 발견이 다른 곳에서 일어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런 기술 개발의 양상은 머빈 켈리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날 글로 썼던 것과 같은 미국 전자공학계의 경쟁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줬다. 또한 최소한 벨 연구소의 지성들, 특히 잭 모턴이 미래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타넨바움은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에게는 집적회로를 만들 수 있는 모든 기술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확산이나 사진 석판술 같은 공정도 벨 연구소가 개발한 거였어요. 하지만 노이스와 킬비 외에는 아무도 선견지명이 없었던 겁니다.”
40. 1960년대에 벨 연구소가 제대로 다음 시기를 구상하고 있는지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이는 없었지만, 만약 그랬다면 그들은 전자 교환과 레이저를 극적이고도 선견지명 있는 성공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같은 시기 벨 연구소에서는 이윽고 세상을 바꿀 만한 다른 업적 몇 가지를 이뤄냈다. 그중 하나는 머레이힐의 컴퓨터 과학자 몇 명이 모여 ‘유닉스’라고 하는 가히 혁명적인 컴퓨터 운영체제를 만들어, 다른 언어의 컴퓨터 기반에까지 깔리게 된 일이었다. 또 다른 돌파구는 CCDCharge-Coupled Device, 전하결합장치로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컴퓨터 기억장치를 만드는 과정에서 개발된 빛 감지 전자 센서였다. CCD는 빛의 양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전자의 여러 가지 반응을 이용하여 극도로 선명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 디지털 사진으로 알고 있는 것의 기반이 바로 이 CCD인데, 그 상업적 가능성을 인정받기 한참 전에 피어스는 CCD를 국가 보안용으로 생각했다. “저는 이것을 즉시 NRO에 내놓았죠.” 당시 베이커는 그가 만들게 했던 정찰 위성 기관인 NRO가 CCD를 첩보 활동에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41. 결국 텔레비전 전화 계획이 자취를 감췄고 그것이 기술적, 경제적으로 실패라는 현실이 확실시되면서, 벨 연구소에서도 텔레비전 전화 서비스를 중단하고 연결을 끊기 시작했다. 40년 후에도 그 장치를 옹호하며 이것이 너무 앞서 갔다던가 당대의 기술적 역량과 네트워크에 비해 지나치게 야심적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인터넷을 통한 화상 채팅이 새롭게 인기를 얻은 것은 이러한 시각을 입증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개발자에게 있어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것은 틀린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시장에서 텔레비전 전화에 대해 보인 거부반응은 신속하고 정확했다. 밥 럭키는 텔레비전 전화의 시카고 시판 이후 몇 년이 지나고 나서 자신의 홈델 사무실을 둘러보다 텔레비전 전화에 눈길이 머물렀던 순간을 회상했다. “아마 저게 세상에 남아 있는 마지막 기계겠지.”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그가 텔레비전 전화를 걸 수 있는 상대는 없었다.
42. 1947년 AT&T는 FCC에 극초단파(UHF)대의 스펙트럼을 더 할당해달라고 진정을 넣기 시작했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이미 휴대전화 사용자들이 쓰고 있는 주파수보다 약간 더 높은 수치의 주파수였다. 기업 차원에서 진정을 하기 위해 기술자들은 장문의 기술 관련 제안서에서 내용을 발췌해 향후 계획을 작성했고 이것은 1947년 12월 초에 완성됐다. 그 제안서는 벨 연구소의 더그 링Doug Ring과 그를 도운 동료 래 영Rae Young이 작성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홈델의 작은 지방 전파 실험실에서 일했다. 그들이 제안서를 쓴 시기는 우연히도 홈델보다 5킬로미터 정도 북쪽에 있는 머레이힐에서 존 바딘과 월터 브래튼이 트랜지스터를 완성하고, 클로드 섀넌이 정보이론 논문을 냈던 시기와 겹쳤다. 그래서인지 링과 영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의 제안서 ‘휴대전화: 광범위한 지역’은 단지 장비를 설치한 차량이라면 국내 어디에서나 휴대전화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의 윤곽을 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제안서에는 아주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들어 있었다. 바로 휴대전화 서비스를 위해 고성능 안테나 하나를 도시 중앙에 배치하는 것보다 여러 개의 저출력 안테나를 넓게 퍼뜨려 배치한다는 발상이었다. 링과 영의 제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휴대전화의 범위를 중앙의 안테나가 그리는 큰 원이 아니라, 구석구석 세워진 안테나들이 만든 작은 6각형이 그리는 벌집 형태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휴대전화가 신호를 수신할 때, 각 6각형은 직경 몇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 별도의 지역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각 6각형은 각기 다른 범위의 주파수를 나타내는 것이다.
43. FCC가 이동무선을 제안하기로 결정한 일이 불씨가 돼 다른 수많은 기술 역시 증기 엔진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엥겔의 동료인 딕 프렌키엘은 벨 연구소의 초기 통화구역 선구자들이 1950년대에 휴대전화 설계를 실제로 시행할 수는 없었으리라고 보았다. 프렌키엘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했다. “휴대전화 시스템은 컴퓨터 기술이지 무선 기술이 아닙니다.” 이동 송수화기에서 지역 안테나로 송수신하는 기술은 어렵긴 해도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벌집 모양의 통화구역을 통해 사용자가 움직이는 위치를 파악하고, 통화 신호 세기를 모니터링하고, 사용자가 움직이는 동안 새로운 채널과 새로운 안테나 탑으로 통화를 전달하는 것이 이 시스템의 논리였다. 이 논리에 필요한 한 가지 하드웨어는 통합 회로였다. 실리콘 칩으로 된 통합 회로에는 조그만 회로와 수천 대의 트랜지스터가 장착됐다. 통합 회로는 프렌키엘이 휴대전화 연구를 시작하기 불과 몇 년 전에 개발된 기술이었다. 그후 벨 연구소의 휴대전화 팀은 FCC 제안서 작업을 시작했고, 캘리포니아 주 산타클라라의 반도체 회사인 인텔(빌 쇼클리의 첫 반도체 회사에서 도망쳐 나온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가 세운 회사)은 ‘4004 마이크로프로세서’라는 혁신적 통합 회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4004 마이크로프로세서는 2,300개의 트랜지스터를 담고 있는 작지만 강력한 컴퓨터였다. 4004는 1세대 장치로, 휴대전화 단말기에 넣으면 고도로 복잡한 필수적인 연산을 처리할 수 있었다. 휴대전화를 가능하게 했던 또 다른 요소는 전화망의 새로운 전자 변환 기지 ESS였다. 벨 연구소가 뉴저지 스카슨나에 최초의 ESS 센터를 세웠을 때, 홍보부는 벨 기술자들에게 ‘ESS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설명해달라고 촉구했다. 6년 후 프렌키엘과 엥겔, 그리고 벨 연구소의 나머지 통신 셀팀은 과연 어떤 서비스가 생길 것인지 구상하고 있었다.
44. 그린 판사는 전화 회사의 방대한 권력과 영향력은 ‘경쟁사가 실제적인 발판을 얻는 것을 막는 능력과 혜택’으로 되돌아온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은 소비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판사는 마침내 정부 규제 기관이 하나 가득 제시한 설득력 있는 증거를 들었다. 경쟁자들은 차례대로 벨 연구소가 통신사업에 진입하는 길을 방해하고 있다고 진술했다. 이 재판은 동시에 아이디어의 대전쟁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재판을 추진하는 윌리엄 백스터에게 있어 AT&T의 근본적인 문제는 AT&T가 수평적으로도, 그리고 수직적으로도 통합돼 있다는 것이었다. 수직적 통합은 AT&T가 자사의 연구와 개발, 제조, 출시를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수직성을 시각화하는 한 가지 방법은 벨 연구소를 일련의 상자로 보는 것이다. 회사의 필수 구성 요소를 나타내는 각 상자는 하나씩 포개져 쌓여 있다. 아이디어와 혁신이 시작되는 맨 아래의 상자는 벨 연구소였다. 그 위에 혁신을 대량생산하는 웨스턴 일렉트릭이 있었다. 제일 꼭대기에는 신기술을 원거리와 지역 시장에 출시하는 AT&T가 있었다.
45. 1982년 1월 8일 금요일 아침, 머레이힐에는 AT&T의 찰리 브라운 회장과 사법부의 윌리엄 백스터가 합의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돌았다. 실상은 단순했다. AT&T가 현지 전화 회사의 권리를 잃는 데 동의했고, 전화 회사들은 모두 각자의 권리를 갖는 별개의 기업이 된 것이다. AT&T는 이와 동시에 1956년 다른 산업 진출을 할 수 없게 막았던 옛 합의 선고에서도 면제를 받았다. 「뉴욕 타임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AT&T는 데이터 처리, 컴퓨터 간 통신, 전화기와 컴퓨터 단말기 장비의 판매 등 이전에 금지됐던 분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게 됐다.” 또한 AT&T는 장거리 서비스도 계속 보유할 수 있게 됐다. 이 합의는 베이커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을 즉시 실현시키지는 않았다. 벨 연구소의 일부 기술자들은 현지 전화 회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떠나야 했지만 대부분은 연구소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웨스턴 일렉트릭과 벨 연구소는 공식적으로 AT&T에 소속돼 있을 수 있었다. 따라서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회사의 수직적 구조가 유지됐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에 대한 기업 분할 그 자체만으로도 2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확실히 남은 다른 계획들은 수년 간, 아니면 그보다 10년이 더 지나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할지 예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46. 벨 연구소의 앞으로 운명은 좀 더 복잡했다. 모리스 타넨바움은 30년의 혜안으로 되돌아봤을 때, AT&T가 AT&T를 위해서가 아니라 벨 연구소를 위해 사건을 재판 마지막까지 끌고 가지 않았음을 후회할 것이라고 했다. “상황이 그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당시 타넨바움은 벨 연구소의 경영진이 회사의 분립에 한 가지 희망을 걸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연구소는 더 이상 트랜지스터 때와 같이 직접 개발한 기술을 넘겨줄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연구소의 혁신을 원하는 사업에 투입할 수 있었다. 벨 연구소 부소장이었던 솔 북스바움Sol Buchsbaum은 당시 이렇게 말했다. “이 합의로 인해 우리는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린 판사도 이 감정을 판결에 반영하는 듯했다. 1984년 분립 직후, 그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기초연구와 응용 기술 두 분야에서 큰 박수를 받았던 벨 연구소는 이제야 그 모든 다양한 측면의 정보산업에서 연구소의 투자자, 과학자, 기술자의 재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좀 더 어두운 전망을 내놓았다. 드러커는 벨 연구소의 분립 직후 그 결정의 의미에 의문을 제기했다. “벨 연구소에 미래가 있는가?” 드러커는 존 메이요나 모리스 타넨바움과 마찬가지로, 50년 이상 벨 연구소가 기여한 기술적 성과가 연구소의 존속을 본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벨 연구소의 발견과 발명은 현대 전자 분야 발명품의 상당 부분을 창조했다.” 그러나 그런 발견과 발명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전자 기술은 불분명해졌다. 드러커에게 통신이란 거대한 정보와 전자 기술 분야의 일부일 뿐이었다. 이 분야에는 경쟁자와 경쟁적 아이디어가 넘쳐났다. 따라서 그 어떤 연구소도 전체 전자정보 산업에서 자력自力으로 신기술을 만들어낼 순 없었다.
47. 예전 벨 연구소와 새로운 벨 연구소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연구소의 초점이 좀 더 제한됐다는 것이다. 수학 부서 관리자였던 연구원 앤드류 오들리즈코Andrew Odlyzko는 1995년 미국의 기술에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 그것이 벨 연구소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다룬 논문을 배포했다. 오들리즈코는 돈을 좀 더 빨리 불리고자 했던 근시안적인 경영의 편협한 야망을 비난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당사자인 지도층의 입장에는 뭔가 더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오들리즈코는 이것을 ‘제한 없는 연구’라고 부르며 이것이 더 이상 논리적이지도 않으며, 회사에 필요한 투자도 아니라고 말했다. 한 가지로는 상업적 혁신(가능하기나 했다면)으로 실제 성공을 보상하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는 것이다. 다른 부분은 벨 연구소 같은 오래된 산업 연구실을 비롯한 학계의 성과 덕분에, 이제는 과학의 기초가 너무 방대해져서 회사가 판도를 바꾸는 발견이나 발명보다는 이익이 되는 전략을 좇는 것만으로도 수익을 얻게 됐다는 것이다.
48. 루슨트의 임원진은 글로벌 통신 산업의 다른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상황이 곧 나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 이후로도 몇 년간 똑같이 어려웠다. 2005년, 프랑스 통신사인 알카텔Alcatel이 루슨트를 합병해서 루슨트를 구하고 이전보다 3분의 1 줄어든 벨 연구소의 명예를 되찾아줄 것이라고 여겼다. 합병으로 탄생한 회사에는 ‘알카텔-루슨트Alcatel-Lucent’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변덕스러운 통신 장비 시장도 안정기에 돌입했다. 영리하고 능력 있는 기술자인 김종훈이 벨 연구소의 사장으로 임명됐다. 김종훈은 벨 연구소를 살리려면 연구소의 구조와 비전, 전략을 바꿔야 한다고 판단했다. 김종훈은 연구소는 일치단결해서 연구소의 혁신이 어떻게 루슨트에 도움이 될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봤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이렇게 기록했다. “김종훈은 아마도 연구소의 타당성을 유지하는 최선의 희망일 것이다.” 그러나 김종훈은 벨 연구소를 과학과 학문의 거점으로 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연구소가 기업가적 사고의 온상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연구소를 되살리는 도전 과제를 경시하지 않았다. 김종훈은 연구소를 개혁하는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 일이 쉬워서 맡은 게 아닙니다. 어려우니까 맡은 거죠.”
49. 혁신과 경쟁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혁신에 뛰어난 회사들은 시장 경쟁에서도 좋은 성과를 낸다. 그러면 시장의 강경한 본성은 회사들을 혁신시키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그러나 벨 연구소의 역사는 실제로 훨씬 더 복잡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시장가치를 잘못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과학 작가인 스티븐 존슨Steven Johnson이 과학 혁신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에서 기록했듯이, 중요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끌어내는 데 있어 경쟁력보다는 풍부한 아이디어의 교환을 촉진시키는 창의적인 환경이 더 중요하다. 실제로 시장 경쟁이 소비자에게 점진적이고 매혹적인 개선점을 주는 데 탁월한 모습을 보였다고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시장 경쟁이 거대한 진보(예를 들면 인터넷이나, 더 앞서서는 항생제의 창조를 가져온 것과 같은 진보)를 촉진시키는 데 효과적이라고는 증명할 수 없다. 사회에 더 크고 가장 오래가는 이득을 가져온 것은 후자이다. 그리고 켈리와 피어스와 베이커 역시 항상 후자를 얻기 위해 분투했다.
50. 피어스는 친구들과 아이디어를 짜내고, 즉시 사라질 것이거나 지속적인 문명화 프로젝트에 흡수될 것들을 만들고 있었다. 피어스는 이것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우려했다. 피어스는 벨 연구소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이런 글을 썼다. “후세에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가 기계의 톱니바퀴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것이 남아 있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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