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독서 기간 : 24.8.6 ~ 8.24
나의 한 줄 리뷰 : 19세기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비극을 낱낱이 밝히고 반성과 교훈을 주는 약자 시점의 역사서.
하이라이트
1. 비극의 역사는 신세계 사람들에게 인디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부터 시작된다. 유럽의 백인들은 그 이름을 조금씩 다르게 인디엔, 인디애너, 인디언 등으로 발음했다. 홍인종은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다.
2. 몇 해 동안 영국 사람들과 인디언들은 평화롭게 이웃해 살았다. 그러나 백인들은 배를 타고 계속 몰려왔다. 도끼 소리와 나무 넘어가는 굉음이 지금 백인들이 뉴잉글랜드라고 부르는 해변가 여기저기에 메아리쳤다. 정착지는 붐비기 시작했다. 1625년 백인 몇 명이 페마퀴드족 추장 사모셋에게 1만 2000에이커를 더 떼어달라고 요구했다. 사모셋은 대지야말로 위대한 정령이 내려주신 것이며 하늘과 같이 무한한 것이어서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이상한 관습을 가진 백인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땅을 넘겨주는 의식을 거행하고 백인들이 만든 문서에다 서명했다. 이것이 영국 식민지인에게 인디언이 땅을 넘겨주면서 최초로 만들어준 증서다.
3. 콜럼버스가 산살바도르에 상륙한 지 3세기 이상이 지났고 영국 사람들이 버지니아와 뉴잉글랜드에 첫발을 디딘 지 2세기 이상이 지나갔다. 콜럼버스를 환영했던 타이노족은 멸족된 지 이미 오래였다. 최후의 타이노족이 죽기 오래전에 이미 단순 소박한 농경수공農耕手工 문화는 파괴되었고 그들의 땅은 노예들이 일하는 목화 농장으로 바뀌었다. 백인들은 땅을 넓힌다고 열대 삼림을 갈아엎었다.
4. 영구적인 인디언 경계선에 대한 침범을 정당화하기 위해, 워싱턴의 정책 입안자들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땅에 대한 탐욕을 고상한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명백한 운명’이란 유럽인과 그 후손들이 신대륙을 다스리도록 운명 지어져 있으며, 지배 민족으로서 당연히 인디언의 땅과 삼림과 광산을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5. 앞으로 30년 동안 이 추장들과 더 많은 사람들이 역사와 전설 속에 등장하게 된다. 그들의 이름은 그들을 멸망시키려 했던 백인들의 이름과 함께 계속 우리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 젊었건 늙었건 그들 대부분은 1890년 12월 운디드니에서 인디언들에게 자유의 종말이 닥치기 훨씬 전에 땅속에 묻힌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영웅이 없는 시대에 그들은 아마 모든 미국인들 중에서 가장 영웅적인 인물들로 기억될 것이다.
6. 나바호족은 남서부의 건조한 바위투성이 땅에 사는 부족으로 대추장은 마누엘리토였다. 마누엘리토는 미국인들과 조약 맺을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군인들이 이곳에 요새를 세우고는 처신을 잘하도록 우리를 지도해준다며 주재관 한 명을 두었다. 주재관은 백인과 평화롭게 살며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약속을 기억할 수 있도록 종이에다 적어놓았다.” 마누엘리토는 조약대로 약속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나바호족의 거친 젊은이 두세 명이 일을 좀 저질렀다고 군인들이 몰려와 그의 토담집을 불태우고 가축을 도살했기 때문에 그는 미국인들에 대해 부아가 났다. 그의 지파는 풍족하게 살아왔는데 군인들 때문에 가난해졌다.
7. 나바호족은 얼마 안 가서 칼턴이 땅과 그 속에 숨어 있는 금속이 가져다줄 부富에 대한 욕심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바호족의 땅을 가리켜 “황금의 땅이며 장엄한 전원, 그리고 풍부한 광석이 묻혀 있는 보고”라고 불렀다. 칼턴은 부하들이 소총을 떨걱거리며 서 있는 사열대 앞을 행군하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으므로 인디언들을 싸울 상대로 정했다. 나바호족은 산속을 달리는 늑대이므로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8. 킷 카슨은 인디언을 좋아했다. 여러 달 동안 백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인디언들과 지낸 적도 있었다. 아라파호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도 있었고 한동안 샤이엔 여인과 산 적도 있었다. 그러나 타오스족의 돈 프란시스코 화라미요의 딸 호세파와 결혼한 뒤 카슨은 새로운 길을 택해 부유해졌고 농장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는 뉴멕시코에서는 거칠고 미신적이며 글자를 모르는 산사람도 꼭대기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몇 마디 말을 읽고 쓰는 것을 배웠다. 키가 5피트 6인치(165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은 하늘에 닿았다. 그러나 올가미는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옷 잘 입고 부드러운 말씨를 쓰는 상류층 사람들에 대한 경외감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 1863년 여름, 킷 카슨은 뉴멕시코 최상층부의 인물인 별대장 칼턴에게 보냈던 사직서를 철회하고 나바호족과 싸우기 위해 윈게이트 요새로 갔다. 전투가 끝나기 전에 그가 칼턴에게 보낸 보고서는 그 거만한 상관의 ‘명백한 운명’에 대한 주장을 그대로 담고 있다.
9. 1866년 9월 1일 드디어 칼턴이 바라던 대어大漁가 제 발로 굴러들어왔다. 대추장 마누엘리토가 기진맥진한 전사 23명을 데리고 윈게이트 요새로 절룩거리며 들어온 것이다. 몸은 바짝 말라서 뼈가 앙상했고 누더기만 걸친 초라한 모습이었다. 손목에는 활 줄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가죽 띠를 둘렀지만 이미 활도 화살도 없었다. 더군다나 부상한 팔 한쪽은 옆구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얼마 후 바본시토가 전사 21명을 데리고 두 번째로 투항했다. 이제 전투추장은 더 이상 남지 않았다.
10. 고향으로 떠나기 직전 각 지파의 추장들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문서(1868. 6. 1)에 서명했다. ‘이 합의서에 서명한 이날부터 쌍방 간의 전쟁은 영원히 종식될 것이다.’ 바본시토가 먼저 서명하고 이어서 아르미호, 델가디토, 마누엘리토, 에레로 그란데와 다른 일곱 명의 추장이 서명했다. 나바호족은 떠날 날을 고대했다. 마누엘리토의 회고담이다. “고향으로 떠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데 왜 그리 낮과 밤이 길던지. 떠나기 전날 우리는 참다못해 고향 쪽으로 한참 걸어가다가 돌아왔다. 떠나는 날 미국인들이 가축을 몇 마리 주기에 감사를 표했다. 어찌나 마음이 조급했던지 마부에게 노새에 채찍질을 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앨버커키에서 산봉우리가 보였을 때 그게 우리의 산인지 미심쩍었다. 땅에 대고 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는 그 정도로 고향 땅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향에 닿자 노인들과 여자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해서 나바호족은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새로운 주거지역의 경계를 정할 때 좋은 목초지는 대부분 백인 이주자들 몫으로 제외되었다. 삶은 쉽지 않을 테지만 어쨌든 그들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11. 백인들은 걸핏하면 우리 고유의 생활을 버리고 자기네처럼 살게 만들려고 한다. 농사를 지으라느니, 열심히 일하라느니. 인디언들은 그런 걸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가 백인들에게 인디언처럼 살라고 했더라면 그들도 반발했을 것이다. 왜 바꿔 생각하지 못하는가. ── 샌티 수우족의 왐디탕카(큰독수리)
12. 워위나파는 그해 여름 수우족을 잡아 죽이기 위해 이미 다코타 지역까지 들어와 있던 시블리의 부하들에게 잡혔다. 그들은 열여섯 살짜리 소년을 미네소타로 돌려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교수형 선고를 받았다. 그때 그는 아버지의 머리가죽과 두개골이 세인트폴의 전시장에 걸려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네소타 주는 작은까마귀를 사살한 이주민들에게 머리가죽 현상금 외에 500달러의 상여금을 더 주었다. 워위나파의 재판기록이 워싱턴에 넘어갔을 때 군 당국은 선고를 인정치 않고 대신 유기징역으로 감형했다. 몇 년 뒤 출감한 워위나파는 이름을 토머스 웨이크먼으로 바꾸고 교회 집사가 되어 수우족 인디언 가운데 처음으로 기독청년연합회(YMCA)를 창설했다.
13. 그해 크로우 샛강을 찾아온 젊은 평원 수우족이 있었다. 그는 친척인 샌티족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땅을 빼앗고 그들을 몰아낸 미국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백인이라는 종족은 둑을 무너뜨리고 모든 것을 앗아가버리는 봄 홍수와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인디언들의 심장이 땅을 지킬 만큼 강하지 못하다면 백인들은 틀림없이 들소가 뛰어다니는 땅을 빼앗으려 들 것이다. 그는 땅을 지키기 위해 백인들과 싸울 결심을 굳혔다. 그의 이름은 타탕카 요탕카(앉은소Sitting Bull)였다.
14. 검은주전자는 왜 미군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평화로운 자기네 마을을 공격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 사정을 알 만한 사람은 샤이엔족의 오랜 친구인 꼬마백인 윌리엄 벤트밖에 없을 것이다. 꼬마백인과 형제들은 벤트 요새를 세우고 30년 넘게 아칸소 강가에서 살아왔다. 윌리엄 벤트는 샤이엔 여자인 올빼미부인Owl Woman과 결혼해 살다가 부인이 죽자 부인의 여동생인 노랑부인Yellow Woman과 다시 결혼했다. 오랫동안 벤트 형제와 샤이엔족은 아주 친밀하게 지냈다.
15. 윈쿱은 미군이 인디언과 싸우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자신이 높은 대장이 아니어서 모든 미군들에 대해 보장할 수는 없지만 백인 포로들을 인도해준다면 인디언 추장들과 덴버로 가서 더 높은 미군 대장과 화약을 맺도록 주선해보겠다고 말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 있던 검은주전자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바위처럼 굳건한 자세로”라고 윈쿱은 묘사했다) 그제야 일어나서, 키다리대장 윈쿱이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다고 인사했다. “못된 백인이 있는가 하면 못된 인디언이 있소. 양쪽의 못된 자들이 이런 분란을 일으켰소. 우리 편 젊은이 몇도 그들에게 가담했소. 나는 싸우는 것에 반대해 싸움을 막으려고 있는 힘을 다했소. 이번 일의 빌미는 백인에게 있다고 믿소. 백인들이 전쟁을 시작해서 인디언들이 대항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소.” 그러고 나서 그는 자신이 보석금을 주고 데리고 있는 네 명의 백인 포로를 인도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머지 세 사람은 북쪽의 한 야영지에 있으므로 그들을 데려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사정을 말했다. 모두 어린아이인 포로 네 명은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실제로 한 군인이 여덟 살 난 앰브로즈 아처에게 인디언들이 어떻게 대해주었냐고 묻자 아이는 인디언들과 지내고 싶다고 대답했다.
16. 시빙턴 대령 옆에 있던 벡워스는 흰영양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손을 올리더니 ‘멈추시오. 멈춰!’라고 소리지르며 지휘관을 만나기 위해 달려왔다. 그는 나만큼이나 분명한 영어로 멈추라고 말했다. 그는 무기를 지니지 않았음을 보이려고 걸음을 멈추고 팔짱을 꼈다. 그때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흰영양은 죽기 전에 죽음의 노래를 불렀다. 오래 살아남는 것은 없다. 이 땅과 산뿐 아라파호 마을 쪽에서도 왼뼈와 그의 부족민들이 검은주전자의 깃발 아래에 닿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왼뼈는 미군과 맞닥뜨리자 적의가 없다는 표시로 팔짱을 끼고 백인은 친구이기 때문에 싸우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총에 맞아 쓰러졌다.
17. 1865년 봄 샤이엔족은 말 먹일 풀이 충분한 텅 강으로 이동해 붉은구름Red Cloud이 이끄는 오글라라 수우족 가까이에 천막을 쳤다. 남부 샤이엔족은 지금까지 8천 명 넘는 인디언들이 한자리에 천막을 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낮과 밤은 사냥과 의식, 축제와 무도로 이어졌다. 조지 벤트는 수우족인 말을두려워하는젊은이Young Man Afraid of His Horse를 자신의 샤이엔 지파인 구부러진창The Crooked Lances의 일원이 되게 했던 일을 회상했다. 수우족과 샤이엔족이 그 당시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인디언들은 부족 나름의 고유한 법과 풍속을 지켰지만, 그들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는 권리를 확신하며 모두 같은 종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8. 1865년 10월 14일, 두 부족의 추장과 원로들은 ‘영구한 평화’에 동의하는 새로운 조약에 서명했다. 조약의 2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덧붙여 이 문제에 관해 인디언들은 다음과 같이 동의한다. ……이후로부터 다음 경계 지역과 그 지역 안에 있는 모든 소유권과 권리를 포기한다. 즉 플래트 강 남북 분기점에서부터 로키 산맥 중심부 혹은 레드 뷰트 산의 북부 분기점, 그곳에서 남쪽으로 로키 산맥 정상을 따라 아칸소 강 상류 지점까지, 그곳에서 아칸소 강을 따라 시마론의 교차지까지, 거기에서 처음 시작된 지점까지, 인디언들이 본래 소유해왔다고 주장하며 소유권을 전혀 포기하지 않았던 전 지역이다.” 이와 같이 샤이엔족과 아라파호족은 콜로라도령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물론 이것이야말로 샌드 크리크 학살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19. 인디언들은 요새를 감시할 일부 병력만 남겨놓고 수많은 영양과 들소 떼가 그들을 배부르게 할 검은언덕의 따뜻한 처소로 돌아갔다. 긴 겨울밤에 추장들은 둘러앉아 이번 전투의 공과에 대해 얘기했다. 아라파호족이 마을과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고 그 많던 말까지 잃어버린 것은 지나친 자만과 부주의 때문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다른 부족들은 사소한 인명 피해가 있었지만 말이나 집은 온전했다. 인디언들은 이번 전투에서 소총과 말안장 등의 장비와 U.S.라는 낙인이 찍힌 말과 노새를 많이 획득했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미군을 몰아낼 수 있다는 새로운 자신감을 얻은 것이었다. 붉은구름은 분연히 외쳤다. “만일 백인이 또다시 내 땅을 밟는다면 그들은 뼈아픈 응징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붉은구름도 자신들의 치명적인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백인이 사용하는 신식 총과 탄약을 얻지 못한다면 끝까지 버텨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20. 그날 작은말은 바위를 무수히 뛰어넘고 여러 개의 골짜기를 건너뛰어 포위된 기병대에 40피트 거리까지 근접해 들어가 활을 쏘는 용맹을 떨쳤다. 붉은 망토를 입은 미네콘주 전사 흰소는 활과 창만을 든 채 자기를 향해 총을 쏘아대는 말 잃은 기병대원에게 돌진해 활로 그자의 가슴을 꿰뚫고 투창으로 머리를 내리 찔러 박살냈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자 샤이엔, 아라파호족과 다른 쪽의 수우족 간에 포위망이 너무 좁혀져 있어서 빗발 같은 화살에 인디언들이 서로 다치는 불상사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었다. 미군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개 한 마리가 죽은 사람 가운데서 빠져나오자 수우족 전사 하나가 그 개를 잡으려고 다가갔다. 그때 샤이엔 전사 불량배Big Rascal가 “그놈을 놓아주지 마라!” 하고 소리치자 누군가가 즉시 화살로 쏘아 죽였다. 이것이 백인들이 ‘페터먼 학살’이라고 부르는 전투다. 인디언들은 이 싸움을 ‘100명을 죽인 전투’라고 부른다.
21. 캐링턴은 그의 뇌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 야만적인 행위를 저지른 까닭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인디언들이 어떤 이교도적인 광신에 사로잡혀 그렇게 끔찍한 행위를 저질렀을 것이라는 글까지 썼다. 그러나 만약 캐링턴 대령이 2년 전의 샌드 크리크 학살 현장에 있었더라면 시빙턴 대령의 부하들이 인디언에게 저질렀던, 페터먼 학살 못지않은 잔혹한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페터먼을 매복 공격한 인디언들은 다만 그들의 적인 백인들의 행위를 그대로 따라했을 뿐이었다. 페터먼 학살은 미국 정부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그것은 인디언과의 전쟁에서 미군이 당한 최악의 패배였으며 미국 역사상 생존자가 돌아오지 못한 두 번째 전쟁이었다. 캐링턴은 직위 해제되었고, 증원군이 파우더 강 지역의 요새로 파견되었으며, 새로운 화평조약 대표단이 라라미 요새에 급파되었다.
22. 셔먼은 인디언들도 자기 땅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고 들짐승에만 의존하는 생활을 버리라고 권고했다. 그러고선 날벼락 같은 말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수우족이 백인들처럼 영원히 자신의 땅을 소유할 수 있도록 화이트 어스와 샤이엔 강을 포함하는 미주리 강 상류 지역을 수우족의 영토로 삼을 것을 제의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선택하는 주재관이나 상인들 외에 다른 백인들은 접근하지 못하게 할 것이오.” 이 말이 통역되자 인디언들은 웅성대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결국 이것이 새 백인 대표단이 원하는 것이란 말인가! 짐을 싸 들고 멀리 미주리 강으로 가버리라니! 여러 해에 걸쳐 테톤 수우족은 들짐승을 따라 미주리 강에서 서쪽으로 옮겨왔다. 그런데 이제 미주리로 돌아가 굶어죽어야 한단 말인가! 아직 사냥감을 찾을 수 있는 곳에서 평화롭게 살아선 안 될 이유라도 있는가? 백인의 탐욕스러운 눈이 이 풍요로운 땅을 벌써 자기들 것으로 삼아버렸단 말인가.
23. 결국 미 국방부는 마지못해 파우더 강 지역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7월 29일 스미스 요새의 부대가 장비를 챙겨 남쪽으로 철수를 개시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붉은구름은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전사들을 이끌고 요새로 들어가 모든 건물에 불을 질렀다. 한 달 뒤에는 필 커니 요새가 폐쇄되었고 그 요새를 불태우는 영예는 작은늑대Little Wolf가 지휘하는 샤이엔족에게 주어졌다. 이삼 일 뒤에 마지막 병사가 리노 요새를 떠남으로써 파우더 강의 보즈먼 도로는 공식적으로 폐쇄되었다. 붉은구름은 2년간의 저항 끝에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붉은구름은 이삼 주 동안 백인 대표단을 기다리게 한 다음 11월 6일 승리의 기쁨에 벅찬 전사들에 둘러싸여 라라미 요새로 말을 타고 들어갔다. 붉은구름은 이제 정복의 영웅으로 조약에 서명하는 것이다. ‘이날부터 이 협정으로 쌍방간의 전쟁은 영원히 종식될 것이다. 미국 정부는 평화를 원하며 명예를 걸고 이 조약을 지킬 것을 서약하는 바이다. 인디언들은 평화를 원하며 명예를 걸고 이 조약을 지킬 것을 서약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 후 20년 동안 1868년 조약의 16개 조항은 인디언과 미국 정부 사이에 논쟁의 불씨로 남게 되었다. 인디언이 조약 내용에 들어 있다고 믿는 것과 의회가 비준한 조약의 내용은 색깔이 다른 두 마리의 말처럼 서로 달랐다.
24. 인디언 전사들은 처음에는 느리게, 그러다가 점점 속력을 가하며 질주해 나아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말에 사정없이 채찍질을 가하며 돌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또다시 백인들의 화기가 앞장선 전사들을 거꾸러뜨려 필사적 돌진을 저지했다. 매부리코가 버드나무숲이 있는 지점까지 돌진했을 때 상반신이 완전히 드러난 그에게 집중 사격이 쏟아졌다. 총탄 한 발이 척추를 꿰뚫고 지나갔다. 그는 덤불 속으로 쓰러졌다. 내내 그렇게 쓰러져 있던 매부리코는 어둠이 내리자 옆의 둑까지 가까스로 기어갔다. 매부리코를 찾고 있던 젊은 전사들이 그를 등에 업고 고지로 날랐다. 여자들이 돌보았지만 매부리코는 그날 밤 끝내 숨을 거두었다. 매부리코의 죽음은 젊은 샤이엔 전사들에게 하늘에서 큰 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과 같은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매부리코는 붉은구름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 부족이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면 언젠가는 승리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또 부족민에게 그런 신념을 불어넣어준 인물이었다.
25. 셰리던은 무조건 요새로 들어와 투항해야만 식량을 주겠다고 대답했다. “지금 화평을 맺고 봄에 다시 백인들을 살해하는 일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완전한 화평을 맺을 마음이 없으면 돌아가도 좋다. 전쟁으로 끝장을 보면 되는 일이니”라고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작은옷이 할 수 있는 말은 한마디밖에 없었다. “우리야 당신이 하라는 대로 따를 뿐이오.” 아라파호족의 노란곰Yellow Bear도 부족을 콥 요새로 데리고 오기로 동의했다. 며칠 뒤 토사위라는 코만치 추장이 부족을 이끌고 투항해왔다. 토사위는 셰리던 앞에 나와서 눈을 빛내며 자기 이름을 말하고는 떠듬떠듬한 영어로 두 마디를 보탰다. “토사위, 좋은 인디언.” 셰리던 장군이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불멸의 말을 내뱉은 것은 바로 이때였다. “내가 본 좋은 인디언은 다 죽었어.” 이 말은 그 자리에 있던 찰스 노드스트롬 중위에 의해 옮겨져서 미국 사람들의 유행어가 되었다.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다.”
26. 갑자기 습격당한 인디언들은 도망갈 시간도 없었다. 키큰소와 20명가량의 전사들은 협곡 뒤로 몸을 숨겼다. 키큰소의 아내와 아이 그리고 포로인 두 명의 독일 여자도 그 가운데 끼어 있었다. 십여 명의 전사들이 협곡 입구에서 그들을 저지하려 했으나 중과부적이라 죽음만 당했다. 키큰소는 가지고 있던 작은 손도끼로 협곡의 바위 벽을 찍으며 꼭대기로 올라갔다. 협곡 꼭대기에서 키큰소는 미군에게 총을 쏘았다. 한 발을 쏘고 고개를 숙여 몸을 피한 뒤 다시 쏘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총탄이 그의 머리를 꿰뚫었다. 순식간에 포니족과 미군들은 키큰소의 아내와 아이를 제외한 모든 샤이엔족을 죽였다. 백인 여자들도 총에 맞았으나 한 명은 살았다. 미군들은 키큰소가 백인 포로에게 총을 쏘았다고 주장했지만 인디언들은 그가 그렇게 쓸데없이 총알을 허비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매부리코는 죽었다. 검은주전자도 죽고 이제 키큰소도 죽었다. 이제 그들은 모두 좋은 인디언들이 되었다. 긍지 높은 샤이엔족은 영양 떼나 들소 떼처럼 점점 줄어들어 멸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27. 보고를 받자마자 담당관은 정부 당국의 즉각적인 조사를 요구했다. 담당관의 영어식 이름은 엘리 새뮤얼 파커였지만 본명은 이로쿼이족 긴집(공회당)의 서쪽 문지기라는 뜻의 도네호가와였다. 뉴욕 토너완다 주거지역에서 살 때 그는 세네카 이로쿼이족의 하사노안다라는 인디언 이름은 백인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파커로 바꿨다. 그는 야심이 있었고 인간으로서 진지한 대우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거의 반세기에 걸쳐 파커는 인종적 편견에 맞서 싸워왔다. 그는 열 살이 되기도 전에 미군 초소의 마부로 일했다. 빈약한 영어 때문에 장교가 그를 놀리자 그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자부심 강한 어린 세네카인은 즉각 선교 학교에 들어갔다. 누구라도 백인들이 다시는 그를 비웃지 못하도록 영어를 아주 잘 읽고 말하고 쓰는 법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 그는 자신의 부족민을 가장 잘 도울 수 있는 길을 찾다가 변호사가 되기로 했다. 그 당시 젊은 사람이 변호사가 되는 길은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다가 국가 사법고시를 보는 것이었다. 엘리 파커는 뉴욕 엘리커트빌의 한 회사에서 3년간 근무한 뒤 사법관이 되려고 응모했지만 뉴욕에서는 백인 남성만이 법에 종사할 수 있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인디언은 신청할 필요도 없었다. 영어 이름을 갖는다고 해서 그의 구릿빛 피부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파커는 단념하지 않았다.
28. 내전이 끝난 뒤 4년 동안 파커 여단장은 인디언 부족과의 이견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필 커니 요새 전투 후 1867년에 그는 북부 평원 인디언들 사이에서 벌어진 소요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미주리 강으로 갔다. 그는 미국의 인디언 정책을 개혁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안을 가지고 워싱턴으로 돌아갔지만 그런 제안을 실행에 옮기는 데는 1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그랜트는 파커가 어떤 백인보다 인디언을 더 현명하게 다룰 거라 생각하고 새 인디언 문제 담당관으로 임명했다. 파커는 열정적으로 새로 맡은 일을 시작했지만 인디언국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패해 있었다. 오랫동안 뿌리박고 있던 관료들을 일소해버리는 것이 선결 과제였다. 그랜트의 도움으로 여러 종교단체의 추천을 받아 주재관을 임명하는 제도를 정착시켰다. 퀘이커교도들이 많이 지원했기 때문에 이 계획은 그랜트의 ‘퀘이커 정책’이라든가 인디언을 위한 ‘유화정책’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인디언 문제 담당국의 운영을 감시하기 위한, 공공 정신을 지닌 시민들로 구성된 인디언 담당관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파커는 백인과 인디언의 공동 구성을 권장했지만 정치권의 간섭이 있었다.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진 인디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인디언은 단 한 명도 임명되지 못했다.
29. 그날 밤 호텔로 돌아온 수우족 대표들은 다음 날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어떤 추장은 백인들의 거짓말에 속아 1868년의 조약에 서명하게 된 경위를 부족민에게 알려주는 것은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차라리 워싱턴에서 죽어버리는 게 나을 거라고 분개했다. 그러나 파커는 한 번 더 회의장에 나오라고 추장들을 설득했으며 그 조약이 인디언들에게 더 나은 방향으로 해석되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또한 대통령을 만나 이 곤란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건의했다. 다음 날 회의가 재개되었다. 도네호가와는 콕스 장관이 조약에 대한 설명을 다시 할 것이라고 말했다. 콕스는 추장들이 오해해서 유감이라고 말하고 파우더 강 지역은 영구 주거지역 ‘밖에’ 있지만 사냥터로 유보된 지역 ‘안’에는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수우족이 주거지역 대신 그들의 사냥터에서 살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으며 또한 교역을 하거나 필수품을 받기 위해 주거지역까지 갈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붉은구름은 2년 동안 두 번째로 미국 정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번에는 한 이로쿼이인의 도움이 컸다. 붉은구름은 앞으로 걸어나와 그 담당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30. 도네호가와가 원한 것은 인디언의 지위 향상이었지만 그 자신이 인디언이기 때문에 호시탐탐 그를 노리는 정적들이 있는 한 그의 지위는 인디언들에게 득보다는 해가 될 것이었다. 또한 계속 그 지위에 붙어 있는 것이 오랜 친구인 그랜트 대통령에게 정치적인 곤경을 안겨줄 수도 있었다. 몇 달 동안 숙고한 끝에 1871년 늦여름 그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친구들에겐 자신이 ‘걸림돌a rock of offence’(이사야 8장 14절)이 되기 때문에 그만둔다고 실토했지만 공적으로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사업을 한다는 구실을 내세웠다. 예견했던 대로 언론은 도네호가와야말로 자기 민족을 배신한 유다이자 ‘인디언 링’의 일원이었음이 틀림없다는 말을 넌지시 흘리면서 그를 공격했다. 도네호가와는 그 모든 것을 일소에 부쳤다. 반세기의 세월 동안 그는 백인들의 편견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 있었다. 그는 뉴욕에서 그 노다지의 시대에 한 재산을 모으고도 남았을 생을 ‘이로쿼이족 긴집의 서쪽 문지기’ 도네호가와로 살았다.
31. 코치스는 치리카우아 아파치족이었다. 그는 자기 부족민들보다 훨씬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가슴은 두툼하고 지적인 얼굴과 검은 눈에 쭉 뻗은 큰 코, 시원한 이마에 머리숱이 많고 피부색이 검었다. 코치스를 만나본 백인들은 그의 태도가 부드러우며 용모는 맑고 단정하다고 말하곤 했다. 백인들이 처음 애리조나에 왔을 때 코치스는 그들을 환영했다. 1856년 그는 제1용기병 연대 이녹 스틴 소령과의 회담에서 캘리포니아 남부로 가는 백인들이 치리카우아 지역을 통과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버터필드 대륙횡단 우체국이 아파치 요새에 역마차 역을 설치할 때도 코치스는 반대하지 않았다. 근방에 살던 치리카우아족은 역에 필요한 재목을 잘라 보급품과 물물교환을 했다.
32. 뉴잉글랜드 출신인 하워드 장군은 웨스트포인트를 나온 게티즈버그의 영웅으로 버지니아 페어오크스 전투에서 한쪽 팔을 잃었다. 하워드 장군은 아파치 요새에서 열하루 동안 머무르면서 코치스의 예의 바른 태도와 솔직담백한 단순성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인디언 여인과 아이들한테도 반해버렸다. 그는 후에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나는 앨라모사 계획을 백지화하고 코치스가 제의한 대로 치리카우아 산 일부와 그 서쪽에 인접한 빅 설퍼스프링, 로저스 농장을 포함한 골짜기를 주거지역으로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백인들의 법에 따라 백인을 새로운 주거지역의 주재관으로 임명해야 하는 것이다. 코치스에게 이런 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든 치리카우아족의 신임을 받는 백인이 한 사람 있었으니, 붉은수염 톰 제퍼즈 말고 누구겠는가! 처음에 붉은수염은 주재관 자리를 극구 사양했다. 경험도 없을 뿐더러 봉급도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결국 코치스의 고집에 굴복했다. 그는 치리카우아족에게 자신의 목숨과 장래를 내맡긴 것이다.
33. 킨트푸애시는 백인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믿고 터놓을 수 있는 백인들을 찾아보러 직접 백인 정착촌을 돌아다녔다. 이레카에서 그는 좋은 사람을 몇 명 만났고, 모도크족은 곧 그곳에 가서 교역을 했다. “백인들이 우리 지역에 올 때면 나는 언제나 여기에 집을 짓고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하곤 했다”고 킨트푸애시는 말했다. “나는 백인들이 여기 와서 산다고 돈을 내라고 하지는 않았다. 여기에 와 살도록 하고 싶었다. 그저 백인들과 함께 지내고 싶었을 따름이다.” 이 젊은 추장은 백인들이 입는 옷이나 집, 마차와 가축 같은 것을 좋아했다. 이레카 주변의 친하게 지내는 백인들은 그들을 찾아오는 인디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다. 모도크족은 재미있어하면서 서로 그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킨트푸애시는 캡틴 잭이었다.
34. 잭은 캔비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불에서 물러났다. 숀친 존이 캔비를 향해 소리쳤다. “미군들을 데려가고 우리 땅을 도로 내놔! 이제 얘기라면 신물이 난다. 더 이상 필요 없어!” 캡틴 잭이 몸을 돌려 모도크 말로 명령했다. “오트 웨 카우 툭스 에!(모두 준비!)” 잭은 외투에서 권총을 꺼내 곧장 캔비를 겨눴다. 방아쇠가 철커덕 당겨졌지만 총알은 나가지 않았다. 캔비가 놀라서 잭을 쳐다보는 순간 다음 총알이 발사되었고 그는 뒤로 넘어져 즉사했다. 보스턴 찰리도 거의 동시에 토머스 목사를 쏘아 죽였다. 위네마는 숀친 존의 권총을 쳐서 목숨을 구했다. 다이어와 리들은 혼란을 틈타 도망쳤다. 캔비의 군복을 벗겨 든 잭은 부족민을 요새로 이끌고 가 미군들의 공격을 기다렸다. 그 마지막 회의에서 정작 쟁점인 후커 짐 일당의 투항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35. 캡틴 잭과 숀친 존, 보스턴 찰리, 블랙 짐은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 물론 변호사 같은 것은 없었다. 증인에게 반대 심문을 할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들은 영어를 거의 몰랐고 말도 서툴렀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미군들은 죄수들의 방책 밖에 교수대를 세웠다. 판결이 어떻게 날지는 뻔했다. 미군 측 증인 가운데는 배반자 후커 짐과 그의 부하들도 있었다. 미군은 후커 짐에게 자기 부족을 배반할 자유를 준 것이다. 후커 짐이 반대 심문을 받는 동안 침묵을 지키던 잭은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후커 짐이야말로 언제나 살인을 자행하면서 싸우기를 원했던 자다. ……인생이란 다만 잠시 동안만 자기 것일 뿐이다. 당신네 백인들은 나를 정복하지 못했다. 나를 꺾은 것은 내 부족민이다.” 캡틴 잭은 10월 3일 교수형을 당했다. 처형 다음 날 밤 몰래 파헤쳐진 그의 시체는 이레카로 옮겨졌다. 얼마 후 썩지 않게 향유를 뿌린 잭의 시체는 동부 여러 도시를 돌며 사육제의 인기 있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입장료는 10센트였다.
36. 철마가 달리는 철도가 그들의 들소 지역에도 들어오리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들은 철도가 플래트 강과 스모키 힐에서 들소를 몰아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철도가 들소 지역으로 들어오는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야 했다. 사탄타는 안절부절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는 미군을 이동시키고 들소를 놀라게 하는 철도 없이 카이오와족이 살아왔던 대로 살게 해달라고 설득하기 위해 요새의 지휘관을 만나고 싶어했다.
37. 사탕크는 시냇물을 건너는 곳에 서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카이오와 말로 소리쳤다. “결코 저 나무를 넘어서지 않으리라.” 실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는 모포를 머리 위까지 끌어올리고 모포 밑에서 손목을 틀어 수갑에서 살갗이 찢어져나간 손을 빼냈다. 그러고는 옷 속에 감춰두었던 칼을 빼들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옆에 있던 미군을 찌르고 마차에서 떠밀었다. 놀란 호송병 한 사람에게서 소총을 뺏어든 순간 마차 밖에 있던 중위가 쏘아 죽이라고 고함을 질렀다. 미군의 일제 사격을 받은 늙은 카이오와 추장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사탕크가 죽기를 기다리느라 마차는 한 시간이나 멈춰 있어야 했다. 미군들은 시체를 도랑에 버리고 텍사스로 여행을 계속했다. 사탄타와 큰나무의 재판은 텍사스 잭스버로의 법원에서 1871년 7월 5일에 열렸다. 혁대에 권총을 찬 목장주와 카우보이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사흘 동안 증언을 듣고 유죄를 선언했으며 판사는 교수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주지사는 그들의 처형으로 카이오와족이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보고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주었다. 이로써 카이오와족은 가장 강력한 지도자 세 명을 잃었다.
38. 1872년에서 1874년 사이에 죽은 370만 마리의 들소 가운데 인디언의 손에 죽은 것은 15만 마리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을 걱정하며 텍사스 백인 몇 명이 셰리던에게 백인 사냥꾼의 전면적인 도살을 막기 위해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들소가 멸종될 때까지 죽이고 가죽을 벗기고 팔도록 놔두는 것이 항구적인 화평을 가져오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오”라고 대답했다. 자유로운 콰하디족은 유용한 짐승들을 절멸시켜 전진하는 문명이라면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 코만치족의 태양 무도회에서 이사타이라는 콰하디 예언자는 들소 구출 전쟁을 부르짖었다.
39. 위대했던 추장들은 가버렸다. 강대했던 카이오와족과 코만치족의 힘은 스러졌고, 그들이 구하려고 애쓰던 들소도 사라졌다. 이 모든 일이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일어났다.
40. 파하 사파, 즉 검은언덕은 세계의 중심지이자 신神과 영산靈山이 모여 있는 곳으로 전사들이 위대한 정령과 만나 영감을 얻는 성지聖地였다. 1868년에 큰아버지는 검은언덕을 쓸모없는 곳으로 여기고 그 지역을 인디언 땅으로 조약에 명기해주었다. 4년 뒤에 백인 광부들은 조약을 어기고 파하 사파에 침범해 들어와 노란 금속을 찾아 바위틈이나 맑은 시냇물을 뒤지고 돌아다녔다. 인디언들은 황금에 눈먼 백인들이 성지에 들어온 것을 볼 때마다 죽이거나 쫓아냈다. 1874년 미국인들로부터 거센 항의가 빗발치자 군부대에 검은언덕을 정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1868년 조약에서는 인디언의 허락 없이는 백인들의 출입을 금했지만 미국 정부는 군인들을 파견하기 전에 인디언들에게 동의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41. 인디언들이 빠져나갈 길은 전혀 없었다. 검은언덕과 파우더 강 지역은 도둑맞았으며 들짐승 떼는 사라져버렸다. 들짐승이나 미국 정부가 주는 식량이 없으면 그들은 굶어죽을 것이다. 게다가 남쪽 멀리 낯선 지역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말과 총을 빼앗긴다면 더 이상 사내 노릇을 못하게 될 것이다. 붉은구름과 부추장들이 먼저 서명을 하고 점박이꼬리와 그의 부족도 서명했다. 그 뒤에 백인 대표단은 스탠딩록, 샤이엔 강, 크로우 크리크(로어 브룰레), 샌티의 주재소를 찾아다니며 온갖 협박을 가해 서명을 받아냈다. 이렇게 해서 파하 사파, 정령과 신비, 광대한 소나무숲 그리고 수십억 달러나 되는 금광이 영원히 인디언의 손을 떠나 백인의 수중에 떨어졌다. 붉은구름과 점박이꼬리가 서명한 지 4주 후 팰로 듀로 협곡에서 카이오와족과 코만치족을 몰살시켰던 세손가락 매켄지의 지휘 아래 8개 중대의 기병대가 로빈슨 요새에서 주재소 마을로 행군해왔다. 국방부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말과 천막을 거두어들였다. 붉은구름과 점박이꼬리를 포함해 모든 남자가 체포되었고 천막은 수색 뒤에 철거되었으며 총과 말은 몰수당했다. 여자들에게는 로빈슨 요새로 물건을 끌고 갈 수 있도록 말을 내주었다. 붉은구름과 다른 추장들을 비롯해 남자들은 모두 요새까지 걸어가야 했다. 자유롭던 수우족은 이제 로빈슨 요새에 갇혀 군인들의 총부리 아래서 살아야 할 것이다. 붉은구름과 점박이꼬리는 검은언덕을 희생하면서까지 마지막 남은 그 조그만 자유를 지키려 했으나 그마저 빼앗겨버렸다.
42. 미친말은 그날 밤, 즉 1877년 9월 5일 밤 서른다섯 살의 나이로 죽었다. 다음 날 새벽 미군은 추장의 주검을 그의 부모에게 넘겼다. 그들은 아들의 시신을 나무상자에 넣고 말이 끄는 트래보이에 붙들어 매고 점박이꼬리 주재소로 실어가 단 위에 올려놓았다. 풀이 마르는 달이 다 가도록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조상객들은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잎이 떨어지는 달에 가슴 찢어지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수우족은 네브래스카를 떠나 미주리 강의 새 주거지역으로 이주해야 한다.” 1877년 건조하고 상쾌한 가을날 인디언들은 미군의 감시 아래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북동쪽의 불모지를 향해 귀양길에 올랐다. 도중에 몇몇 지파가 행렬에서 빠져나가 북서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들은 캐나다로 도망가 앉은소와 합류할 작정이었다. 도망가는 사람들 중에는 아들의 심장과 유골을 간직한 미친말의 부모도 있었다. 그들만이 아는 장소, 운디드니Wounded Knee라고 불리는 조그만 샛강에, 수우족 말로 ‘창크페 오피 와크팔라’ 근처 어딘가에 그들은 자식의 뼈를 묻었다.
43. 1805년 9월 서쪽으로 가는 길에 로키 산맥에서 내려와 굶주림과 이질에 걸려 신음하던 루이스와 클라크의 탐험대를 구해준 인디언 부족이 바로 네즈페르세족이다. 네즈페르세(뚫린코)라는 이름은 이들이 코에 조개껍데기를 걸고 다니는 모습을 본 프랑스 덫사냥꾼이 붙여준 것이었다. 네즈페르세족이 마음만 먹었다면 클리어워터 강가에서 루이스와 클라크의 목숨을 끊고 그들의 말을 빼앗았겠지만 네즈페르세족은 그 얼굴 하얀 미국인들을 환대해 음식을 내주고 그들이 카누로 태평양 연안까지 탐험하는 몇 달 동안 말을 돌보아주었다. 네즈페르세족과 백인들의 오랜 우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70년 동안 네즈페르세족은 단 한 명의 백인도 죽인 적이 없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땅과 황금에 대한 백인들의 탐욕이 그 우정을 깨뜨렸다.
44. 어둠이 내리고 투항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하얀새와 끝까지 항복하기를 거부한 전사들은 서너 명씩 골짜기를 빠져나가 캐나다 국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튿날 그들은 국경을 넘었고 사흘째 되는 날엔 멀리 말을 탄 인디언을 보았다. 다가오던 인디언 하나가 신호를 보냈다. “당신네는 어느 부족이오?” “네즈페르세. 당신들은?” “수우족.” 이렇게 해서 머나먼 길을 도망쳐온 네즈페르세 전사들은 드디어 앉은소의 품에 안겼다. 그러나 조셉 추장과 다른 사람들에게 자유는 없었다. 곰외투의 약속과 달리 라프와이 대신 그들은 가축처럼 캔자스 레번워스 요새로 송환되었고, 그곳의 낮은 늪지대에 전쟁포로로 감금되었다. 거기서 100여 명이 죽어나간 뒤에 다시 인디언령 불모지로 이송되었다. 모도크족과 같이 거기서도 말라리아와 화병으로 수없이 죽어갔다.
45. 재판의 클라이맥스는 선곰이 그의 부족을 변호한 최후진술이었다. “나는 지금 군인들에게 잡혀 있소. 북쪽의 고향 땅을 바라보면서도 가지 못하는 신세요. 나는 내 몸과 내 부족을 구하고 싶소. 나의 형제들이여, 우리 부족은 길길이 타오르는 초원의 불 앞에 서 있는 듯하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달려나가 목숨을 구해줘야 합니다. 우리 부족이 물이 넘쳐흐르는 강둑에 서 있다면 하늘을 날아서라도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가야 할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전능하신 하느님이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내 말을 듣고 계십니다. 제발 선한 영혼을 보내 당신들 마음을 움직여서 나를 돕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속임수로 땅을 빼앗긴 백인이 있어 땅을 도로 찾으려고 애쓴다면 아무도 그 사람을 욕하지 않을 겁니다. 나를 보시오. 나를 불쌍히 여겨 우리 어린애들과 부녀자들의 생명을 구하도록 해주시오. 여러분, 대항할 수 없는 힘이 몰려들어 나를 땅에 눕히려 들고 있습니다. 나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으로 할 말은 다했소.” 던디 판사는 인신보호법Habeas Corpus act의 정신으로 볼 때 인디언도 ‘사람’이고 이주의 권리는 백인과 마찬가지로 인디언이 타고날 때부터 지닌 고유한 권리이며 평화 시에는 민간이건 군이건 그 어떤 권한으로도 인디언의 동의 없이 인디언을 송환하거나 그의 의사에 반해 특정 주거지역에 유폐시킬 수 없다고 판결했다.
46. 인디언령의 퐁카족은 쓰라린 교훈을 배웠다. 백인의 법은 환상이었다. 그 법은 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샤이엔족과 마찬가지로 멸족되어가는 퐁카족은 두 파로 갈리게 되었다. 북쪽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하려는 선곰의 지파와 인디언령에서 포로로서 가냘픈 삶을 이어가는 흰독수리의 지파로.
47. 미국 정부가 “인디언들의 생존을 위해 지출한 물품과 식량 배급을 악질적인 주재관과 사기꾼 같은 교역 상인들이” 약탈해갔다는 것이 크룩의 조사에 의해 밝혀졌다. 더군다나 백인들은 고의로 아파치족을 도발해 격한 행동을 저지르도록 조장하고 있다는 많은 증거가 드러났다. 그렇게 되면 인디언을 몰아내라는 캠페인이 벌어질 것이고 그 넓은 땅은 자연히 백인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었다.
48. 조지 크룩이나 존 클럼, 휴 스콧 같은 얼마 안 되는 백인 친구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아라바이파족은 모빌 강가의 초소에서 열병에 걸려 땅속에 파묻혔을 것이다. 그 백인 친구들은 곰외투나 국방부의 반대에 맞서 에스키민진과 아라바이파족이 산 카를로스로 돌아오는 데 힘을 써주었다. 하지만 애리조나 시민들은 제로니모의 치리카우아족만큼은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카이오와족과 코만치족은 아파치족의 숙적이었지만 휴 스콧 중위에게 치리카우아족의 곤란한 사정을 듣고 오클라호마에 있는 자신들의 주거지역 일부를 내주었다. 1894년 제로니모는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실 요새에 이감되어 1909년 포로의 몸으로 죽었다. 그는 실 요새 근처의 아파치 묘역에 묻혔다. 전설에 의하면 매장된 지 얼마 안 돼 그의 유해는 몰래 남서쪽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는 아마도 모골론 산이나 치리카우아 산 아니면 멕시코의 시에라 마드레 산 깊은 곳에 묻혀 있을 것이다. 제로니모는 아파치 최후의 추장이었다.
49. 1890년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찢기고 피 흘리는 부상자들이 촛불 켜진 예배당에 옮겨졌을 때 아직 의식을 잃지 않은 인디언들은 서까래에 장식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볼 수 있었다. 설교단 뒤의 합창대석 위에는 엉성한 글씨로 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땅에는 평화, 사람에겐 자비를. 그 당시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이 끝장났는지 모르고 있었다. 이제 나이 들어 높은 언덕에 올라 돌아보니 학살당한 여인네들과 아이들의 시체가 굽이도는 계곡을 따라 겹겹이 쌓이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게 보인다. 나는 또 한 가지, 그 피 묻은 눈보라 속에 죽어 묻혀 있는 걸 본다. 한 민족의 꿈이 거기 죽어 있다. 그건 아름다운 꿈이었다. 이젠 사람 사이의 연줄은 끊어지고 흩어져버렸다. 더 이상 중심이라곤 없고 신선한 나무는 말라죽었다. - 검은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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