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난요 바타차리야 지음, 박병철 옮김
독서 기간 : 23.9.21 ~ 10.12
나의 한 줄 리뷰 : 진정한 천재의 업적과 인간다움을 깊이 음미하고, 주어진 현재와 펼쳐진 미래를 품게되는 책.
하이라이트
1. 폰 노이만은 자신이 촉발한 혁명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진보에는 치료법이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에세이 중 하나의 제목은 「인간은 기술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였습니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잠정적으로 “아마도”였습니다.
2. 천재 노이만의 최대 관심사는 언어도, 역사도 아닌 수학이었다. 대부분의 수학자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현실적인 응용과 무관하게 수학 정리를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고상한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수학은 우주를 이해하고 서술하는 데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과학적 언어이다. 20세기 최고의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조차도 “경험과 무관한 사고思考의 산물이 어떻게 현실 세계를 그토록 정확하게 서술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며 의문을 제기했을 정도이다.
3. “폰 노이만은 중증의 사고 중독자였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중독 증상을 보인 분야는 수학이었다.” — 피터 랙스Peter Lax, 1990
4. 노이만 야노시 러요시Neumann János Lajos(영어 이름은 존 루이스 노이만John Louis Neumann, 헝가리식 인명은 이름보다 성이 먼저 나온다)는 1903년 12월 28일에 아름다운 불꽃의 도시,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5. 노이만은 2개의 서로 다른 모임collection을 구별함으로써 러셀의 역설을 해결했다. 그는 이것을 ‘I. Dingen(1개인 것)’과 ‘II. Dingen(2개인 것)’으로 정의했는데, 요즘 수학자들은 이것을 각각 집합set과 클래스class라 부른다. 노이만은 클래스를 ‘특성을 공유하는 집합들의 모임’으로 엄격하게 정의했다. 그의 이론에서 ‘모든 집합으로 이루어진 집합’이나 ‘모든 클래스로 이루어진 클래스’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모든 집합으로 이루어진 클래스’만이 존재할 뿐이다. 노이만의 체계를 도입하면 형태론에서 제기된 제한을 전혀 받지 않으면서 러셀의 역설을 우아하게 피해갈 수 있다.
6. 리에스와 피셔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냈다. “파동함수의 제곱이 1이면, 이것을 만든 직교함수의 각 계수를 일일이 제곱해서 모두 더한 값도 1이다.” 이 정리를 들은 노이만은 곧바로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의 연결고리로 눈을 돌렸다. 전개된 파동함수expanded wavefunction(직교함수의 합으로 표현된 파동함수- 옮긴이)를 자세히 보니, 각 직교함수에 곱해진 계수들이 상태를 나타내는 행렬 요소(행렬 속에 들어 있는 숫자들- 옮긴이)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아닌가! 완전히 다르게 보였던 두 공간은 사실 동일한 공간이며, 파동 이론과 행렬 이론을 분석하는 기반이었다.
7. 노이만은 양자역학의 분산형 앙상블이 동종임을 증명했다. 앙상블의 모든 구성 입자들은 외부에서 관측이 실행될 때까지 동일한 양자중첩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노이만은 이전 단계에서 ‘숨은변수가 존재한다면 앙상블은 일반적으로 동종일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증명했으므로, 이런 경우를 따로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노이만의 증명은 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하는 물리학자들에게 최고의 희소식이었다.
8. 위그너를 태운 배는 1930년 1월에 뉴욕항에 도착했고, 갓 결혼한 노이만은 아내 마리에트 코베시Mariette Kövesi와 함께 다음날 도착했다. 두 사람은 프린스턴에서 재회한 후에도 여전히 헝가리어로 대화를 나눴지만, 하루빨리 미국 문화에 익숙해지기로 다짐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평생 얀시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노이만은 조니가 되었고, 위그너의 애칭 제노Jenö도 유진Eugene으로 바뀌었다. 훗날 위그너는 미국에 갓 도착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말했다. “노이만은 미국에 도착한 첫날부터 마치 집에 있는 것처럼 만사가 편안했다. 그는 돈을 좋아하고 인류의 진보를 굳게 믿는 쾌활한 낙천주의자인데, 알고 보니 그런 사람은 유럽의 유태인 집단보다 미국에 훨씬 많았다.”
9. 언젠가는 양자역학보다 나은 이론이 등장할 수도 있지만, 벨의 이론과 실험에 의하면 비국소성은 새 이론의 일부(또는 상당 부분)가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노이만의 신중한 보수주의적 태도는 한 번도 역풍을 맞지 않았다. 100여 년 전에 신흥 물리학자들과 노이만이 함께 구축한 양자 이론은 지금도 마땅한 대안 없이 물리학의 정설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 실행된 그 많은 실험에서 숨은변수는 단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더 깊은 수준에서 인과율이 적용된다는 증거도 없다. 우리가 아는 한, 이 세상은 모두 양자이다.
10. 평소 쇼비니즘(극단적 애국주의- 옮긴이)을 경멸했던 힐베르트는 허탈한 심정으로 사태를 관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5년 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처음으로 주요한 국제 수학 회의에 정회원국 자격으로 초청되었다. 그때 독일의 수학자들은 “그동안 국제 수학계가 우리를 철저히 따돌렸는데, 초청장이 왔다고 냉큼 달려가는 것은 치욕스런 행위”라며 불참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힐베르트는 이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67명의 대표단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연설문을 낭독했다. “국가와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 과학의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는 지극히 사소한 이유로 이런 일을 자행해왔습니다. 수학에 인종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오직 수학에 머무는 한, 전 세계는 하나의 국가입니다.”
11. 미국이 곧 전쟁에 휘말릴 것을 예측한 노이만은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전쟁 준비를 돕기로 마음먹고, 참전 여부에 영향을 행사할 만한 정계 인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히고 다녔다. 그가 1941년 9월에 자신의 지역구 하원의원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히틀러에게 대항하는 것은 남의 나라 일이 아닙니다. 문명국이라면 당연히 참전하여 그를 물리쳐야 합니다. 미국이 히틀러와 타협한다면 머지않아 심각한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12.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에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으로 유명했는데, 내파 설계를 폐기한 직후에 그가 내린 결정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그는 1943년 7월에 노이만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당신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지금 이곳에서는 많은 이론가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당신의 통찰력으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바라본다면 새로운 해결책이 나오리라 확신합니다. 가능하다면 임시직이 아닌 정규직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저의 설명을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오셔서 보기만 하면 제 말을 금방 이해하실 겁니다. 부디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노이만은 흔쾌히 수락했다.
13. 여러 차례 실험을 거친 후 노이만과 텔러는 “노이만의 제안대로 설계를 변경하면 내파형 폭탄은 포신형 폭탄보다 효율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적은 양의 플루토늄으로 동일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로스앨러모스의 모든 과학자에게 커다란 뉴스거리였다. 폭탄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의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정제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난제였기 때문이다.
14. 노이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TNT 5,000톤은 되겠어요, 아니, 더 클지도 모르겠네요.” 엔리코 페르미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잘게 찢어서 가만히 놓았더니. 2.5미터쯤 날아가다가 땅에 떨어졌다. 그는 약간의 암산을 거친 후, 폭탄의 위력이 TNT 1만 톤에 해당한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예측은 모두 빗나갔다. 나중에 확인한 결과, 트리니티 실험의 파괴력은 TNT 2만~2만 2,000톤에 달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오펜하이머는 갑자기 시인이 된 듯, 고대 힌두고 경전 『바가바드기타Bhagavad Gita』의 한 구절을 조용히 읊기 시작했다. “나는 죽음이요, 이 세상의 파괴자이니…” 그러자 옆에 있던 베인브리지가 마무리를 지었다. “…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세상에 둘도 없는 망나니가 되었다.”
15. 몇 가지 증거에 의하면 독일은 이미 1943년 3월부터 미국의 핵폭탄 공격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정책 입안자들은 독일에 투하한 핵폭탄이 불발되었을 경우, 독일의 과학자들이 그것을 분해하여 그들만의 폭탄을 만들 수도 있다며 폭탄 투하를 반대해왔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가? 당시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일본의 과학기술이 독일보다 못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6. 역사학자들 중에는 인종차별주의에서 해답을 찾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인은 일본에서 건너온 이민자를 몹시 경멸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한 직후 미국 정부는 수천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집단수용소에 가둬놓고 평범한 시민을 범죄자로 모는 등 인종차별과 전시 히스테리wartime hysteria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것은 전시상황에 벌어진 비상대책이라기보다 정치적 리더십의 실패에 가깝다. 혹자는 핵폭탄을 ‘진주만 공습의 복수’로 해석하기도 한다.
17. 노이만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곳은 교토, 히로시마, 요코하마, 고쿠라 무기고였는데, 이것은 나중에 위원회가 내리게 될 결정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그런데 과거에 교토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던 스팀슨이 “1,100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고 지금도 문화의 중심지인 교토만은 절대로 폭격하면 안 된다”며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교토 대신 나가사키가 후보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 8월 초에 요코하마가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되면서 목록에서 제외되었고, 이제 남은 곳은 히로시마와 고쿠라 무기고, 그리고 나가사키였다.
18. 유럽전선에서 연합군(주로 영국 공군)은 독일의 드레스덴에 수백 대의 폭격기로 융단폭격을 시도하여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리틀보이와 팻맨은 단 몇 분 만에 그보다 훨씬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이런 일은 면밀한 조사 없이 역사 속으로 묻혀선 안 되며, 두 도시의 시민들이 겪었던 끔찍한 경험을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후, 일본의 과학자와 의사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입은 피해 정도를 뒤늦게나마 분석했는데, 그들이 제출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두 도시에 닥친 비극은 인류의 멸망을 예견하는 묵시록의 첫 장章이었다.”
19. “사람들이 자신의 발명품과 보조를 맞출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달을 넘어 우주로 진출할 수 있겠지. 하지만 보조를 못 맞추면 그 기계는 우리가 만든 폭탄보다 훨씬 위험할 거요.” 노이만은 미래의 기술을 구체적으로 예견하면서도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보다 못한 클라라가 그에게 수면제 두 알과 독한 위스키를 먹였더니 불길한 망상에서 깨어난 듯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그를 사로잡았던 미래의 비전이 무엇이었건 간에 노이만은 관심은 순수수학에서 그가 두려워하는 미래의 기계로 옮겨갔고, 한번 불붙은 열정은 끝까지 식을 줄을 몰랐다.
20. ENIAC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태어난 전쟁 기계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다른 용도가 부각되자 기계의 존재 이유가 가장 큰 단점으로 떠올랐다. 프로젝트 팀원 중 이 문제를 가장 정확하게 간파한 사람은 노이만이었다. 팀원뿐만 아니라, 그만큼 잘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을 수시로 바꿀 수 있는 유연한 컴퓨터”의 설계도가 이미 노이만의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ENIAC 운영팀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나름대로 기계의 단점을 인식하고 해결책을 물색해왔는데, 여기에 노이만이 합류하여 날개를 단 셈이 되었다.
21. 흥미로운 것은 노이만이 20세기 초에 수학에 닥쳐온 위기를 극복하면서 연마한 실력이 첨단 컴퓨터의 탄생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현대 컴퓨터의 지적 기원이 완전하고 결정 가능한 수학 체계를 세우려는 힐베르트의 시도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힐베르트가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발표한 직후에 오스트리아의 수학자 쿠르트 괴델은 “수학이 완전하거나 자체 모순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악몽 같은 정리를 증명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 후, 23세의 영국인 수학자 앨런 튜링은 힐베르트의 ‘결정 문제’를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공략하여 수학이 결정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상상 속의 기계를 소환했다.
22. 노이만은 현대식 컴퓨터의 개념을 구체화할 때 괴델과 튜링의 논리 체계를 가이드라인으로 삼았는데, 이들 사이의 연결고리는 컴퓨터 역사상 가장 중요한 논문으로 꼽히는 노이만의 역작 「EDVAC에 대한 첫 번째 보고서First Draft of a Report on the EDVAC」에 잘 나와 있다.(EDVAC은 Electronic Discrete Variable Automatic Computer의 약자이다- 옮긴이) 컴퓨터 공학자 볼프강 코이Wolfgang Coy는 이 논문을 “현대식 컴퓨터의 출생증명서”로 정의했다. 완벽한 수학을 추구했던 힐베르트의 프로그램이 좌초된 지 10년 만에 엉뚱한 곳에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23.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인 진술은 수학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 번째 옵션, 즉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진술이 존재한다”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다. 이 결과에 담긴 의미 중 하나는 플라톤의 이데아idea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괴델도 말년에는 이 점에 동의했다). “수학적 진실은 ‘이곳in here’에 있지 않고 ‘저 너머out there’에 존재한다. 따라서 수학은 발명된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다.”
24. 노이만은 쾨니히스베르크 회의가 끝난 후에도 괴델의 증명을 계속 생각하다가, 11월 20일에 편지 한 통을 써서 괴델에게 보냈다. “당신이 성공적으로 도입했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해서 … 저 역시 놀라운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젠 저도 ‘수학에 자체 모순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루빨리 저의 증명을 보여드리고 싶군요. 출판 준비도 이미 마쳤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괴델이 자신의 논문을 학술지에 보낸 후였기 때문이다.
25. 지금도 컴퓨터 설계자들은 컴퓨터의 전체적인 구성을 ‘폰 노이만 구조von Neumann architecture’라 부르고 있으며, 요즘 사용되는 대부분의 컴퓨터(스마트폰, 노트북, 데스크톱 등)는 이 원칙에 따라 제작된다. 단, 여기에는 메모리에서 명령과 데이터를 찾거나 가져올 때 순차적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근본적 단점이 있다. 이것을 ‘노이만 병목현상von Neumann bottleneck’이라고 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메시지를 앞뒤로만 전달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이것은 어떤 연속 처리 방식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나 단순한 구조에서 얻은 엄청난 장점을 생각하면, 이 정도 단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ENIAC은 더하고 빼는 모듈module(독립적인 구성 요소- 옮긴이)이 20개인 반면, EDVAC에는 단 하나밖에 없다.
26. 연방법원의 최장기 재판 기록을 세운 이 기나긴 소송전에서 결국 법정은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에 “어느 누구도 독점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로부터 약 10년 후, 미국에서는 “기업 비밀을 지양하고,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공유하여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자”는 오픈소스운동open source movement이 일어나 수많은 발명가와 혁신가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컴퓨터 분야에서 이런 분위기가 초창기부터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은 노이만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7. ENIAC의 운영자 중 한 사람이었던 진 바틱Jean Bartik(원래 이름은 베티 진 제닝스Betty Jean Jennings임)은 1947년 3월에 프로그램 전문가로 고용되었는데, 오직 이 업무 하나를 위해 사람이 고용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지구촌에 ‘프로그래머’라는 직종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
28. 현대 컴퓨터의 기초인 논리학과 수학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던 사람이 그것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영향력, 그리고 운영 능력을 최고 수준으로 발휘하면서 더욱 강력한 기계가 만들어지도록 밀어붙이는 추진력까지 갖췄다니, 인류의 역사에 이런 인물이 또 나올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노이만이 세상을 떠난 후, 비글로는 다음과 같은 글로 그를 추모했다. “노이만은 우리 마음속에 엉켜 있는 거미줄을 말끔하게 제거했다. 그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진 계산 능력이 과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 침투하여 세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제 우리는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29. 게임이론은 인류 역사상 가장 “무질서하고 비이성적이었던” 시기에 복잡다단한 현실 세계의 문제를 깔끔한 수학 논리로 해결하고 싶은 노이만의 열정에서 탄생했다. 게임이론의 해답은 가끔 냉정하고 파격적이면서 사람의 복잡한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매우 효과적이다.
30. 1926년 12월 7일, 노이만은 괴팅겐의 수학자들 앞에서 최대최소 정리minimax theorem를 증명했다. 이 내용을 담아 1928년에 출판한 논문 「응접실 게임의 이론적 분석On the Theory of Parlour Games」에서, 노이만은 게임이론의 학문적 기반을 구축하고 사람들 사이의 협동과 갈등 관계를 수학적으로 분석했다.
31. 우리에게 친숙한 대부분의 게임에서 한 플레이어가 이기려면 혼합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이 세상 모든 타짜들이 알고 있듯이, 예측 불가능한 요소는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자신의 논문에 담긴 의미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던 노이만은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수학을 통해 내려진 결론과 경험적 사실(예를 들면 포커에서 적절한 블러핑bluffing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일치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론이 이미 실험적으로 검증되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32. 경제학자들의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노이만의 ‘일반적 경제 균형의 모형A Model of General Economic Equilibrium’은 경제학계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노이만의 논문에 자극받은 수학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경제 분야로 뛰어들어 암울했던 과학에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기 시작했고, 1950년대에는 고정점 정리로부터 경제학의 핵심적 결과가 줄줄이 증명되었다. 드디어 수리경제학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33. 노이만은 ‘합리적rational’이라는 말의 의미를 게임이론의 관점에서 새롭게 정의했다. “합리적 사고를 하는 다른 플레이어를 상대로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펼치는 사람이 바로 ‘합리적인’ 플레이어다. 물론 양쪽 다 합리적인 경우에는 최소한의 이득만이 돌아오지만, 상대방이 실수하면(즉 비합리적인 전략을 펼치면) 더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다.” 그러므로 합리적 행동은 게임 중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하나로 모은 ‘완벽한 전략 지침서’로 요약된다. 그리고 여기에 효용이론utility theory을 적용하면 플레이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숫자로 나타낼 수 있으므로 수학이 엄청나게 단순해진다.
34. 노이만은 댄치그의 최적화 문제가 2인 제로섬 게임의 최대최소 정리와 수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금방 알아차렸고, 그 덕분에 댄치그의 문제를 “해결 가능한 문제”와 “해결 불가능한 문제”로 빠르게 분류할 수 있었다. 오늘날 선형 프로그램은 데이터센터 내부에 서버를 배치하는 문제에서 백신의 구매 및 배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의 해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35. 과학자들의 열띤 설명을 경청한 후, 노이만이 말했다. “여러분, 문제가 뭔지 정확하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RAND의 과학자들은 판서를 하고 차트를 넘기면서 또다시 두 시간에 걸친 장황한 설명을 이어나갔고, 노이만은 손을 머리카락 속에 파묻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 노이만은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이더니 멍하니 바라보았다. RAND의 과학자들은 그가 “지나치게 복잡한 설명을 듣다가 정신줄을 놓은 것 같았다”고 했다. 잠시 후 노이만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 문제는 컴퓨터가 없어도 됩니다. 제가 답을 알고 있거든요.” 할 말을 잃은 채 눈만 끔뻑이는 과학자들 앞에서 노이만은 문제의 해답으로 가는 몇 가지 단계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한 후, 아무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자, 이제 점심 먹으러 갑시다!”
36. 인공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에 대한 매컬러와 피츠의 논문을 읽은 후로 생물학에 관심을 갖게 된 노이만은 졸 스피겔만Sol Spiegelman과 막스 델브뤽Max Delbrück 등 분자에 기초하여 생명을 연구하는 과학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도 항상 그래왔듯이 노이만은 이 분야를 폭넓게 파고들다가 다소 불확실하면서도 직관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그의 아이디어는 훗날 이 분야에 투신한 학자들에게 방대한 양의 연구 과제를 안겨주게 된다.
37. 노이만의 몸을 잠식하던 암이 어느새 뇌까지 도달했다. 그는 잠결에 헝가리어로 잠꼬대를 했고, 병실을 지키던 군인들을 불러서 “본부에 급히 전할 메시지가 있다”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지구에서 가장 예리했던 한 사람의 지성은 그렇게 서서히 저물어갔다. 마지막 순간에 노이만은 마리나에게 “7+4” 같은 단순한 산수 문제를 내달라고 부탁했는데, 마리나가 던진 몇 개의 문제에 노이만은 하나도 답하지 못했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마리나는 눈물을 흘리며 병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38. 클라라는 미완성으로 끝난 자신의 회고록 마지막 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긴장을 풀고 무지개 좇기를 그만두었다.” 또 ‘조니Johnny’라는 제목이 달린 장章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된다. “이상하고 모순적이면서 논쟁을 즐기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아이처럼 순진하면서 쾌활했고, 복잡하고 천덕스러우면서 이 세상 누구보다 똑똑했지만, 감정을 다스리는 능력은 거의 원시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자연의 커다란 수수께끼, 그러나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편이 더 좋은, 그런 수수께끼 같은 남자였다.”
39. 아무리 부작용이 심각하다 해도, 새로운 아이디어의 출현을 막을 수는 없다. 오직 세상을 불안정하고 위험하게 만들기 위해 개발된 기술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유용하게 쓸 수 있다. … 진보의 부작용을 막는 치료제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분야에서 폭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발전의 혜택을 있는 대로 누리고 싶다면 100퍼센트 안전한 삶은 포기해야 한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삶’이며, 안전도를 높이려면 국가 중대사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내리는 판단에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기술의 모든 폐해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만병통치약은 없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부분적인 치료제를 갖고 있다. ‘인내심’과 ‘유연한 사고’, 그리고 지구의 생명체 중 오직 인간만 갖고 있는 ‘지성’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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