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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

국화와 칼

by Jungi 2025. 3. 17.

 

국화와 칼 책 표지

루스 베네딕트 지음, 왕은철 옮김

 

독서 기간 : 25.3.6 ~ 3.17

 

나의 한 줄 리뷰 : 일본인의 이중성을 포용적으로 받아들이고, 두 상징이 보여주고, 보여줄 의미가 인상깊은 책.

 

하이라이트
1. 일본은 미국이 지금껏 전면전으로 맞붙었던 적군 중 가장 종잡을 수 없는 상대였다. 과거에 치렀던 전쟁에서는 그처럼 이질적인 행태와 사고방식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1905년에 우리보다 먼저 일본과 싸웠던 제정러시아가 그랬듯이, 미국은 서구의 문화적 전통에 속하지 않은 데다 완전무장을 갖췄고 잘 훈련되기까지 한 나라를 적으로 마주했다. 서구 국가들이 인간의 본성이라 여기고 받아들였던 전쟁의 관례가 일본인의 의식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 보니 태평양전쟁에서는 섬 해안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하거나 군수품을 조달하는 일보다 적의 특성을 파악하는 일이 더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적과 맞서 싸우려면 먼저 그들의 행동 양식을 이해해야 했다.
2. 일본인은 전문적인 훈련을 통해 정신을 높은 경지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 전제로 생각해보면, 대위는 그 방법을 익혀서 성과를 낸 것이다. 미국인인 우리는 일본인의 이런 극단적 행태를 가난한 나라의 변명이나 기만당한 국민의 유치한 소행이라 여기고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단지 그렇게만 평가한다면, 전시나 평시에 그들을 적절히 다루는 능력을 그만큼 잃게 된다. 일본인의 신조는 일정한 금기와 거부, 일정한 훈련과 훈육 방식을 통해서 뇌리에 각인되었다. 이를 고립된 지역의 괴팍한 사고방식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3. 미국인은 끊임없이 도전하는 세계에 맞춰 삶의 방식을 조정하고, 도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이에 반해 일본인은 사전에 계획되고 승인된 삶의 방식 안에서만 안도감을 느낀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일을 마주했을 때 가장 큰 위협을 느낀다. 일본이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끊임없이 드러났던 또 다른 주제는 일본인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들은 “세계의 눈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라는 말을 거듭 입에 올렸다. 그러므로 그들은 일본 정신을 제대로 보여줘야 했다. 미군이 과달카날(Guadalcanal)섬에 상륙하자 일본은 군인들에게, 지금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으니 우리의 진가를 보여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 해군은 어뢰에 맞아 구명정을 타게 될 때도 최대한 품위를 유지하라는 지침을 받았다. 그러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세계가 제군을 비웃을 것이다. 미국은 그대들의 모습을 영화로 만들어 뉴욕에서 상영할 것이다.” 이처럼 자신들을 세상에 어떤 식으로 보여주느냐가 일본인에게는 중요한 문제였으며, 이는 일본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관심사이기도 했다.
4. 일본인은 하나같이 천황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겼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의심의 눈초리로 검증하고 비판할 수 있다고 여기는 미국인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태도였다. 그리고 결국 패전했을 때 일본인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5. 8세기가 막을 내리기 전 후지와라(藤原) 귀족 가문이 권력을 잡고 천황을 뒷전으로 밀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봉건영주들이 후지와라의 권력에 도전했고, 나라 전체가 내전에 빠져들었다. 그 결과, 유명한 미나모토노 요리모토(源賴朝)가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옛 군사적 칭호인 쇼군에 올라 나라의 실질적 지도자가 되었다. 쇼군은 ‘야만인을 정벌하는 대장군’(征夷大将軍)이라는 뜻이다. 일본에서 늘 그러하듯, 요리모토는 자기 후손들이 다른 봉건영주들을 억제할 힘이 있는 한 계속 쇼군 칭호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이에 따라 천황은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 형식적으로나마 쇼군을 임명하는 것이 천황의 주요 권한이었으며, 내정에는 일체 관여할 수 없었다. 실질적 권력은 막부(幕府)가 장악했으며 이들은 복종하지 않는 영주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려고 했다. 다이묘라 불리던 영주들은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사무라이를 거느렸다. 그들은 경쟁 상대의 영지나 지배자인 쇼군의 ‘적합한 자리’를 두고 벌어질 싸움에 늘 대비하고 있었다.
6. 도쿠가와 시대의 사무라이는 단순히 칼을 휘두르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점차 영주의 자산 관리인이자 고전극 혹은 다도(茶道)처럼 평온한 예술의 전문가가 되어갔다. 그들은 모든 의전을 도맡았고 다이묘의 책략을 능숙하게 수행했다. 2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태평한 시대가 이어졌는데, 이때는 개인적으로 칼을 휘두를 기회가 적었다. 상인들이 신분상 규제를 받으면서도 도시적이고 예술적이며 유쾌한 오락을 숭상하는 삶의 방식을 발전시킨 것처럼, 사무라이들은 칼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으면서도 평화의 예술을 발전시켰다. 농민들은 사무라이에 대해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했고, 과중한 세금을 내면서 여러 사회적 제약까지 있었지만, 몇 가지는 보장받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농토를 가질 수 있었다. 일본에서 땅을 가졌다는 것은 신망을 얻었다는 뜻과 같다.
7. 일본 정부는 과거 경험에서 형성되고 자기들의 윤리 체제와 예의범절 속에서 형식화된 복종의 관습에 의존한다. 국가는 ‘각하’들이 ‘적합한 자리’에서 자기 일을 제대로 하면, 그들의 특권을 존중해준다. 꼭 그들의 정책을 인정해서라기보다는 일본에서는 특권들 사이의 경계를 넘는 것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 ‘여론’은 낄 자리가 없다. 정부는 ‘대중적 지지’만을 요구한다. 지역적 관심사의 영역까지 국가가 권한을 행사하려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존중한다.
8. 이와 같은 일본 산업의 이중성은 일본인의 생활 방식에서 정부나 종교의 이중성 못지않게 중요하다. 일본 정치인들은 다른 분야의 위계에 부합하도록 재정 분야에서도 상류계급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기들을 위해 전략산업을 육성하는 한편, 정치적으로 득이 될 만한 상인 가문을 골라 다른 위계들처럼 ‘적합한 자리’를 주었다. 그들에게는 정부와 재벌들이 맺은 관계를 끊을 계획이 전혀 없었다. 재벌들은 지속해서 이윤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높은 지위까지 부여해준 온정주의 정책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이윤과 금전을 향한 일본인의 전통적인 태도를 고려하면 재벌은 국민에게 공격받아 마땅했으나, 정부는 계층에 관한 통념에 따라 위계를 세우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만 그런 시도가 완벽하게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젊은 장교로 구성된 군인 집단과 시골 지역 주민들이 재벌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론이 가장 혹독하게 공격한 대상은 재벌이 아니라 나리킨(成金)이었다.
9. 일본식 장기에서 온 이 단어는 여왕으로 승격된 졸(卒)을 의미하는데, 나리킨은 그런 짓을 할 만한 위계적 권리가 없음에도 ‘거물’처럼 장기판 위를 미쳐서 날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일본인은 다른 사람을 속이고 착취해서 부자가 된 자를 나리킨이라고 지칭한다. 따라서 나리킨을 향한 일본인들의 비난은 ‘성공한 하인’을 대하는 미국인의 태도와 거리가 멀다. 일본은 계층제도 안에서 부자에게 자리를 마련해주고 그들과 연합해왔다. 하지만 정해진 자리 밖에서 부를 얻은 자들에 대해서는 반발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10. 가장 큰 것에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누군가 지고 있는 빚을 일컫는 ‘의무’에 해당하는 말은 ‘온’(恩)이다. 일본어에서 쓰이는 용례로 미루어 생각하면 의무(obligation)와 충성(loyalty)에서부터 친절(kindness)과 사랑(love)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으로 옮길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단어를 선택하든 영어로 번역했을 때는 온이 지닌 의미가 왜곡된다. 만약 온이 사랑이나 의무를 뜻한다면 자녀에게도 그 단어를 쓸 수 있겠지만, 일본인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또, 온은 충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일본어에는 충성을 뜻하는 어휘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어떤 상황에서 쓰이건 ‘온’과 동의어가 아니다. ‘온’은 무거운 짐, 부채, 부담 등을 뜻한다. 개인은 윗사람에게 온을 받는다. 윗사람이 아니거나 적어도 자신과 동등한 지위의 누군가에게 온을 받으면 불쾌한 열등감을 느낀다. 어떤 사람이 “나는 그에게 온을 입고 있다”라고 말했다면, ‘나는 그에게 큰 의무감을 느낀다’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이런 채권자, 즉 은혜를 베푼 사람을 ‘온진’(恩人)이라고 부른다.
11. 일본인은 온의 상환을 규칙이 서로 다른 두 영역으로 구분한다. 하나는 자기가 받은 만큼을 기한 안에 갚는 것이다. 한없이 온에 보답하는 것을 ‘기무’(義務: 의무)라고 하는데, 이에 관해 일본인은 “받은 온의 만분의 일도 갚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기무는 부모에 대한 온을 갚는 ‘고’(孝: 효)와 천황에 대한 온을 갚는 ‘주’(忠: 충)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이 둘은 모든 사람에게 의무적으로 적용된다.
12. 일본은 서구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 일본은 서구 국가들의 마지막 수단인 혁명을 이용하지 않았다. 점령군에게 사보타주하지도 않았다. 일본은 그들이 가진 힘을 이용했다. 그것은 아직 싸울 여력이 있음에도 무조건 항복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주’로서 요구하는 능력이었다. 일본인의 눈에는 엄청난 희생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소중한 것을 얻었다. 비록 항복을 명했지만, 그 명령을 천황이 내렸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였다. 이처럼 전쟁에 패배했어도 최고의 법이 주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13. 일본인이 서양인에게 기리의 뜻을 설명하려 들지 않았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일본어 사전에서조차 기리를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전은 이렇게 풀이했다. “올바른 길, 인간이 따라가야 하는 길, 후회하지 않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일.” 이런 뜻풀이만으로 서양인이 기리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마지못해’라는 단어를 통해서 기리가 기무와 다르다는 것쯤은 파악할 수 있다. 기무는 아무리 어려운 요구가 따르더라도 반드시 완수해야 하는 것으로, 개인이 직계가족, 국가, 삶의 방식 그리고 애국심의 상징인 천황에게 지는 의무다. 날 때부터 단단히 엮여 있는 끈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만 한다. 아무리 ‘마지못해’ 복종하는 마음으로 행하더라도, 기무는 ‘마지못해’ 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없다. 반면 ‘기리 갚기’에는 불쾌한 일들이 많다. ‘기리 안에서’는 채무자의 어려움이 최고치에 이른다.
14. 일본인의 영원불멸한 목표는 명예다. 명예를 얻으려면 타인에게 존중받아야 한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은 상황에 따라 취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 처지가 달라졌을 때 일본인은 태도를 바꾸고 새로운 길을 택한다. 서양인과 다르게 일본인은 이런 처신을 도덕적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15. 일본인이 좋아하는 소소한 육체적 쾌락 중 하나가 온욕(溫浴)이다. 부유한 귀족뿐 아니라 가난하기 짝이 없는 농부나 비천한 신분의 하인 계층에서도 매일 저녁 뜨겁게 덥힌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이 일상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가장 흔히 쓰는 욕조는 나무통인데, 그 밑에 숯불을 피워서 수온을 43도까지 올린다. 사람들은 몸을 깨끗이 씻은 다음 욕조에 들어가 따뜻한 기운을 즐기며 휴식한다. 그들은 턱까지 물이 차도록 태아처럼 무릎을 구부린 자세로 앉아 있다. 몸을 청결하게 유지하고자 날마다 목욕하는 것 자체는 미국인과 같지만, 일본인은 거기에 수동적 탐닉이라는 예술적 가치를 더한다. 이는 다른 나라의 목욕 습관에서 찾기 힘든 특성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 가치는 점점 더 높아진다.
16. 일본인이 길러온 또 다른 ‘인정’(人情, 닌조)은 낭만적 사랑이다. 비록 결혼 방식과 가족에 대한 의무에 어긋나지만, 그럼에도 낭만적 사랑은 일본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일본 소설은 낭만적 사랑을 많이 다루는데, 프랑스 문학에서 그러하듯 주인공은 이미 결혼한 사람이다. 연인이 사랑을 이룰 수 없어서 함께 자살하는 일은 그들이 즐겨 읽고 대화의 소재로 삼는 주제다. 11세기의 『겐지 이야기』(源氏物語)는 세계 어느 나라의 위대한 문학작품에도 견줄 수 있을 만큼 낭만적 사랑을 정교하게 다룬 소설이다.
17. ‘인정’에 대한 일본인의 생각은 여러 결과를 낳는다. 그것은 육체와 정신이 인간의 삶에서 우위를 확보하려고 끊임없이 싸운다는 서양 철학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일본 철학에서 육체는 악이 아니다. 육체적 쾌락을 즐기는 것도 죄가 아니다. 정신과 육체는 우주의 상반된 힘이 아니다. 일본인은 이런 원리로 세계가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18. 일본인이 말하는 ‘진심’의 근본 의미는 일본의 규율과 정신이 제시한 ‘길’을 따르려는 열의(熱意)다. 마코토가 특정 상황에서 아무리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해도, 그것은 항상 일본 정신이라고 인정되는 측면 또는 덕목의 지도 위에 표기된 공인 지표를 칭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 이 같은 발상은 일본인이 자기 감시와 자기 감독을 얼마나 부담스럽게 여기는지 말해주는 증거다. 그들은 이런 제약이 없어질 때 비로소 자유를 얻으며 효율적으로 생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인은 관찰자 자아를 자기 안에 있는 합리적 원리와 같은 것으로 여기며, 위기 상황을 ‘차분하게 대응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데 일본인은 무아지경이 되어 자기 감시가 강요하는 제약을 잊을 때, 목에 매여 있던 맷돌이 떨어졌다고 느낀다.
20. 일본 지도자들이 미래를 염두에 두고 나라를 재건한다면, 남자아이들이 학교와 군대에서 하급자를 괴롭히고 어리석은 짓을 시키는 관습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상급생과 하급생 사이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 애교심에 호소하거나 혹은 동창 간의 유대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군대에서도 괴롭힘을 금지하는 게 좋을 듯하다. 일본에서는 2년 차 병사가 신병에게 스파르타식 훈련을 시키는 것을 모욕으로 여기지 않는다. 계급에 관계없이 모든 장교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괴롭힘은 모욕이다. 만약 학교나 군대에서 나이 많은 사람더러 나이 어린 사람 앞에서 개처럼 꼬리를 흔들라고 하거나, 매미 흉내를 내라고 하거나, 남들이 식사하는 동안 물구나무를 서게 하는 행위를 처벌한다면, 천황의 신성을 거부하거나 교과서에서 국가주의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보다 일본을 재교육하는 데 훨씬 큰 효과를 볼 것이다.
21. 오늘날 일본인들 사이에서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만들고 하지의 구속력에 의문을 품게 하는 자유는 그들의 생활 방식을 유지해온 섬세한 균형을 깨뜨릴 우려가 있다. 물론 그들은 새 제도 밑에서 구속을 새로 배워야 한다. 변화하려면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새 통념과 덕목을 세워나가는 것은 무척 어렵다. 서구 세계는 일본인이 이런 통념과 덕목을 발견하는 즉시 받아들여서 자기 것으로 완전히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 일본이 더 자유롭고 덜 엄격한 윤리를 확립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미국에 사는 일본인 2세들은 이제 일본식 규율을 모른다. 그래서 실천할 수도 없다. 그들의 가문은 이미 부모 나라의 관습을 엄격하게 지키라고 그들에게 요구할 만한 힘을 잃어버렸다. 본토에 있는 일본인들도 새 시대를 맞아 예전처럼 개별적인 절제를 요구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국화는 철사 고리가 없어도 가지치기를 완벽하게 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다.
22. 일본에서 통용되는 이런 의미로 볼 때, 칼은 공격의 상징이 아니라 이상적이고 자신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에 비유된다. 개인적 자유를 존중하는 제도에서 이런 덕목보다 더 좋은 균형추는 있을 수 없다. 일본의 양육과 행동 철학은 마음에 심겨서 일본 정신의 일부가 되었다. 오늘날 일본인은 서구적 의미에서 “칼을 내려놓자”라고 제의했다. 일본적인 의미에서 그들은 녹슬 위험이 있는 내면의 칼이 녹슬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왔다. 덕목에 관한 그들의 어법으로 보면, 칼은 그들이 더 자유롭고 더 평화로운 세계에서도 간직할 수 있는 상징이다.
23. 일본인은 침략 전쟁이 ‘오류’요 ‘실패한 목표’라고 인정함으로써 사회적 변화의 첫걸음을 크게 뗐다. 그들은 평화로운 국가들 사이에 끼어서 존경받는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렇게 되려면 세계가 평화로워져야 한다. 러시아와 중국이 앞으로 몇 년 동안 군사력 증강에 나선다면, 일본은 전문 지식을 활용해서 전쟁에 뛰어들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일본이 평화로운 나라가 될 가능성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일본의 동기는 상황에 의존한다. 만약 여건이 마련된다면 일본은 평화로운 세계 속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군비경쟁이 심한 세계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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