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지음, 최완규 옮김
독서 기간 : 25.2.18 ~ 3.5
나의 한 줄 리뷰 : 범시대적, 범지역적인 사례들을 통해 정치·경제 제도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깨닫게 하는 책
하이라이트
1.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 데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경제제도를 갖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와 정치제도다. 정치 및 경제 제도의 상호작용이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한다는 것이 우리가 제시하는 세계 불평등 이론의 골자다.
2. 에스파냐가 미 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내내 비슷한 제도와 사회구조가 생겨났다. 약탈과 금은보화에 눈이 먼 식민지 개척 초기가 지나자 에스파냐는 원주민을 수탈하기 위한 제도를 거미줄처럼 뽑아냈다. 엔코미엔다, 미타, 레파르티미엔토, 트라진에 이르는 온갖 제도가 죄다 원주민의 삶을 연명 가능한 최저 생계 수준까지 끌어내리고 그 잉여분은 모조리 에스파냐가 수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땅을 몰수하고 강제노역을 시키면서도 최저임금만을 지급하며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자발적으로 사지 않은 물품에 대해서도 고가의 가격을 매기는 방법으로 수탈을 자행한 것이다. 이런 제도 덕분에 에스파냐 왕실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정복자들과 그 후손들 역시 부를 누릴 수 있었지만, 이 때문에 남아메리카는 세상에서 가장 불평등하고 경제적 잠재력을 송두리째 빼앗긴 대륙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3. 1618년, 회사는 ‘인두권제도headright system’를 도입했다. 개척민 남성에게 50에이커의 땅을 주고 가족 구성원 한 명당 또다시 50에이커를 추가로 부여하며, 그 가족이 버지니아로 데려오는 모든 하인에 대해서도 따로 토지를 주는 제도였다. 정착민은 살 집을 부여받고 계약으로부터 해방되었다. 1619년에는 ‘식민지의회General Assembly’가 발족되어 식민지 통치와 관련된 법과 제도 수립 과정에서 사실상 모든 장년 남성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미국 민주주의의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에스퍄나가 멕시코와 중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성과를 거둔 전략이 북아메리카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첫 번째 교훈을 얻는 데 12년이나 걸린 꼴이었다. 이후 17세기 내내 두 번째 교훈을 두고 투쟁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경제적으로 성장 가능한 식민지를 건설하는 유일한 대안은 개척민이 투자를 하고 땀 흘려 일할 의욕이 생길 만한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4. 우리는 불평등한 세상에 살고 있다. 나라 간의 차이는 규모가 더 클 뿐 허리가 잘린 노갈레스 시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자 나라에서는 개인들이 더 건강하고 오래 살며 교육도 잘 받는다. 또 휴가나 직업 같은 가난한 나라 사람이 꿈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혜택과 선택권을 누리고 산다. 부자 나라 사람이 차를 모는 도로는 여기저기 푹푹 패여 있지도 않다. 이들은 자기 집에서 화장실과 전기, 수돗물을 마음껏 쓸 수 있다. 또 그런 나라의 정부는 대개 멋대로 사람을 체포하거나 괴롭히지도 않는다. 부자 나라 정부는 오히려 교육, 보건, 도로망, 법질서 등 공공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시민이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해 자신의 나라가 정치적인 면에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일정 수준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5. 모든 사회는 국가와 시민이 함께 만들고 집행하는 정치·경제적 규율에 따라 제 기능을 수행한다. 경제제도는 교육을 받고, 저축과 투자를 하며, 혁신을 하고 신기술을 채택하는 등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국민이 어떤 경제제도하에서 살게 될지는 정치 과정을 통해 결정되며, 이 과정의 기제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정치제도다. 가령 한 나라의 정치제도는 시민이 정치인을 통제하고 그들의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결정한다. 불완전하나마 정치인이 시민의 대리인 역할을 착실히 수행할지는 바로 그런 능력으로 결정된다. 시민에게 그럴 능력이 없거나 부족하다면 정치인은 주어진 또는 찬탈한 권력을 남용하거나 자신의 부를 축적하며 시민의 이익을 저버리고 자기 잇속만 챙길 수도 있다. 정치제도에는 국가가 사회를 규제하고 다스릴 권한과 역량도 포함된다. 사회 전반에 정치권력이 분배되는 방식을 결정하는 요소들 역시 폭넓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히 다양한 그룹이 결탁해 집단 이익을 추구하거나 다른 집단의 이익 추구를 가로막을 힘을 키우는지 주시해야 한다.
6. 문화적 요인 가설이 세계 불평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문화와 관련이 있는 사회 규범이 중요하고 바꾸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 책이 세계 불평등을 설명하는 근거인 제도적 차이를 그런대로 입증해주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체로 아니라고 해야 옳다. 종교, 국민 윤리,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의 가치관 등 흔히 강조되는 문화적 측면이 오늘날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왔으며 세계 불평등이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남아 있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서로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고 얼마나 협력할 수 있는지 등 다른 문화적 측면도 중요하긴 하지만 이는 대부분 제도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지 독립적인 원인이라 할 수 없다.
7. 무지 가설이 지리적 요인이나 문화 가설과 다른 점은 빈곤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무지 때문에 가난해졌다면, 지도자와 정책입안자를 계몽해 교육하면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고 적절한 조언을 제공하고 올바른 경제 운용이 어떤 것인지 정치인을 설득하면 지구촌의 번영을 ‘도모’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부시아의 경험만 놓고 보아도 시장실패를 줄이고 경제성장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정책을 채택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정치인의 무지가 아니라 이들이 사회에서 직면하는 인센티브와 제약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8. 전통적으로 경제학은 정치를 외면해왔지만, 세계 불평등을 설명하려면 정치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경제학자 아바 러너Abba Lerner가 1970년대 지적했듯이 “경제학이 사회과학의 꽃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이미 해결된 정치문제를 주요 연구분야로 삼은 덕분”이다. 우리는 번영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일부 기본적인 정치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간 경제학은 정치적 문제들이 이미 해결되었다고 가정해왔다. 세계 불평등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그런 가정 때문이었다. 세계 불평등을 설명하려면 서로 다른 정책과 사회적 환경이 경제적 인센티브와 행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이해해야 하므로 경제학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치적 설명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9. 사유재산이 없다는 것은 투자하거나 생산성을 높이기는커녕 현상 유지를 해야 할 인센티브를 느끼는 사람이 드물다는 뜻이다. 북한 정권의 숨 막히는 억압에 시달리다 보니 혁신이나 신기술 도입 등은 꿈도 꾸지 못한다. 하지만 김일성과 김정일, 이들의 막료는 체제를 개혁하거나 사유재산, 시장, 사적 계약제도를 도입하거나, 경제 및 정치 제도를 손질하려는 의사가 전혀 없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이유다. 한편 남한은 투자와 교역을 장려하는 경제제도를 갖추고 있다. 남한의 정치인이 교육에 투자한 덕분에 문맹률은 현저히 낮고 교육수준은 대단히 높다. 남한 기업은 비교적 잘 교육받은 인력과 투자 및 산업화를 독려하는 정책, 수출시장, 기술 이전 등을 십분 활용했다. 남한은 머지않아 동아시아에서 ‘경제 기적을 이룬 나라’,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 중 하나로 발돋움했다.
10. 포용적인 경제제도가 도입되면 경제활동이 왕성해지고 생산성이 높아지며 경제적 번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은 사유재산권 보장이다. 사유재산권을 가진 자만이 기꺼이 투자하고 생산성을 높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하는 족족 도둑맞거나 몰수당하거나 세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업가는 투자와 혁신을 도모할 인센티브는커녕 일하고자 하는 인센티브조차 가지지 못할 것이다. 당연히 사유재산권은 사회 대다수 구성원에게 공평무사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11. 경제성장과 기술 변화에는 위대한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가 지적한 이른바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가 수반된다. 옛것을 새것으로 갈아 치운다는 것이다. 새로운 분야가 낡은 분야에서 자원을 빼앗아오고, 신생기업이 기성기업의 시장을 잠식하며, 신기술이 기존 업무 능력과 기계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것 등이 바로 창조적 파괴의 예다. 경제성장 과정과 그 기반이 되는 포용적 제도는 정치 현장은 물론 경제시장에서도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낸다. 포용적 경제제도 및 정치제도를 반대하는 이면에는 창조적 파괴에 대한 공포가 숨어 있다.
12. 명예혁명으로 왕과 가신의 권한은 약화되었고 경제제도를 결정할 권한은 의회에 귀속되었다. 동시에 사회 각계각층이 폭넓게 참여하는 정치체제가 마련되었다. 사회 전반이 정부의 기능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명예혁명은 다원적 사회를 만드는 발판을 마련했고 더 나아가 중앙집권화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세계 최초로 포용적 정치제도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명예혁명이었다.
13. 일본의 도쿠가와막부는 절대왕정이자 착취적 성향을 띠었지만 도처에 할거하던 지방 유력자인 다이묘大名에 대한 통제력이 미미했으며 도전받기 일쑤였다. 중국에서도 농민반란이나 백성과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중국의 절대왕정은 훨씬 더 강력했고, 저항 세력은 조직력이 약하고 자율성도 떨어졌다. 또한 중국에서는 황제의 절대적 권력에 도전해 다른 제도적 갈림길을 갈 만한 일본의 다이묘에 해당하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중국이나 일본을 서유럽과 비교할 때보다 그다지 크지 않은 제도적 차이지만, 영국과 미국이 강압적으로 문호개방을 요구하며 만들어진 결정적 분기점에서는 여전히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에도 절대주의를 고수했지만, 일본에서는 미국의 위협이 도쿠가와막부에 대한 반대 세력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는 정치혁명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정치혁명은 한층 포용적인 정치제도로 이어졌고 그에 따라 더 포용적인 경제제도 역시 발달할 수 있었으며, 궁극적으로 빠른 경제성장의 토대가 되었다. 반면 중국은 절대주의 체제를 고수한 탓에 한참 뒤처지고 말았다.
14. 하지만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포용적 제도가 가져다주는 성장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중요한 차이점은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기술적 변화를 필요로 하는 지속적인 성장이 아니라 기존 기술에 바탕을 둔 성장이라는 점이다. 구소련의 경제 역사만 보더라도 생생하게 드러나는 사실이다. 착취적 제도하에서 정부가 권위와 인센티브를 내세우며 고속 경제성장을 주도할 수 있을지라도 이런 성장은 머지않아 제동이 걸리고 결국 무너지고 만다.
15. 중앙계획경제하에서 진정으로 효과적인 인센티브를 도입할 수 없었던 것은 상여금 정책의 기술적 오류 때문이 아니다. 착취적 성장을 달성하는 방법 자체의 태생적인 문제다. 이런 성장은 정부의 명령으로 가능했다. 정부 명령은 일부 기본적인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을 유도하려면 개인이 재능과 아이디어를 활용해야 하는데 소비에트식 경제제도로는 절대 달성할 수 없는 목표였다. 소련의 지배층은 착취적 경제제도를 포기해야 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위험에 빠뜨릴 수밖에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7년 이래 착취적 경제제도에서 벗어나자 공산당의 권력이 흔들렸고 이와 함께 소련도 맥을 못 추기 시작했다.
16.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이 극심한 제한을 받는 것은 창조적 파괴와 혁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마야 도시국가의 역사는 착취적 제도의 태생적인 논리에서 비롯되는 한층 더 불길하고, 안타깝게도 한층 보편적으로 귀결되는 운명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제도를 통해 엘리트층은 상당한 이득을 취할 수 있으므로 다른 이들이 현재 엘리트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반기를 들 강력한 인센티브가 생기기 마련이다. 따라서 내부 분쟁과 불안정은 착취적 제도에 반드시 수반되는 태생적 특징이며, 비효율성을 심화시킬 뿐 아니라 중앙집권화된 정치권력을 와해시키기 일쑤이며, 심하면 법과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려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고전기를 거치는 동안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던 마야 도시국가도 종국에는 이런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17. 기술혁신이 결여된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노예제도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로마인이 장악한 영토가 확대되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노예로 전락했고, 걸핏하면 이탈리아로 데려와 대형 사유지에서 일을 시켰다. 로마 시민이 일해야 할 필요성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정부가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물자로 먹고살면 그만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혁신이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이미 혁신이란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새로운 인물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 인물이 기존 문제에 대해 새로운 해법을 제시해야 가능한 일이다. 로마에서 생산을 담당한 계층은 노예였고, 훗날에는 준노예 신분의 소작농이 가세했다. 혁신을 이루어봐야 자신이 아닌 주인 배만 불릴 테니 혁신을 꾀할 인센티브가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18. 물론 로마가 유럽에 오랜 세월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야만인이 세운 왕국은 로마의 법과 제도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결국, 봉건질서로 이어진 분권화된 정치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도 로마의 몰락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이 걸리긴 했지만(물론 역사적 우발성이 작용하기도 했다) 이 과정의 부수 효과로 노예제도가 사라지고 독립도시가 탄생한 바 있다. 이는 흑사병이 봉건사회를 뒤흔들고 있을 때 특히 큰 영향을 미쳤다. 흑사병의 잿더미 속에서 더 강력한 도시가 부상했고 농민은 더 이상 땅에 예속되지 않아 봉건적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로마제국의 몰락으로 시작된 이런 결정적 분기점들은 엄청난 제도적 부동 과정으로 이어지며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19. 신석기혁명에서 산업혁명까지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나아지지 않은 주된 이유는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기술혁신은 인류사회에 번영을 가져다주지만, 옛것을 새것으로 갈아치우고 특정 계층의 경제적 특권과 정치권력을 파괴한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업무 방식이 필요하고, 이런 것들은 곧잘 리와 같은 새로운 주역과 함께 등장한다. 사회에 번영을 가져준다 해도 그 때문에 촉발되는 창조적 파괴 과정은 옛 기술을 사용해 일하는 이들의 생계를 위협한다. 가령 리의 기술이 도입되었다면 손뜨개질을 하는 노동자는 실업자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리의 양말 짜는 틀 편물기계처럼 중대한 혁신은 정치권력의 판도마저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가 리에게 특허를 거부한 것은 사실 그의 기계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될 백성이 가여워서가 아니었다. 정치적 패자로 전락할 것이 두려웠던 것뿐이다. 리의 발명품으로 곤경에 처한 백성이 정치 불안을 초래하고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뒤흔들 수 있다는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20. 마그나카르타에 이어 최초의 의회가 선출되었지만, 왕권과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정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엘리트층 내부의 분쟁은 랭커스터Lancaster가家와 요크York가 사이의 오랜 왕위 쟁탈전인 장미전쟁과 함께 막을 내렸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쪽은 랭커스터가였고, 1485년 왕위 계승권자였던 헨리 튜더Henry Tudor가 즉위해 헨리 7세라 칭하며 튜더왕조를 열었다. 이와 함께 두 가지 서로 연관된 과정이 전개되었다. 먼저 튜더왕조는 중앙집권화에 박차를 가했다. 1485년 이후 헨리 7세는 귀족을 무장 해제시켰다. 사실상 무력을 빼앗고 중앙정부의 힘을 대폭 확대한 것이다. 그의 아들인 헨리 8세는 수석 장관이던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을 통해 정부에 가히 혁명적인 일을 실천한다. 1530년대 크롬웰은 기초적인 수준의 관료주의 정부를 도입했다. 더 이상 왕의 개인 살림을 도맡아 하지 않고 꾸준히 이어질 만한 독립된 제도로서 정부를 설립한 것이다. 헨리 8세가 로마 가톨릭교회와 인연을 끊고 ‘수도원 해산Dissolution of the Monasteries’ 조치를 통해 모든 교회 토지를 몰수하면서 한층 더 튼튼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교회의 무력화는 중앙집권정부 강화 노력의 일환이었다. 정부제도를 중앙에 집중함으로써 처음으로 포용적 정치제도가 가능해졌다.
21. 연합세력이 광범위했다는 것은 다원주의적 정치제도 창설에 대한 요구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였다. 어떤 식으로든 다원주의가 뿌리내리지 않으면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 중 하나가 나머지를 물리치고 권력을 찬탈할 위험이 상존했다. 1688년 이후 의회가 그런 폭넓은 연합세력을 대변했다는 사실은 의원들이 의회 밖의 인민은 물론 투표권이 없는 이들이 제기하는 청원에까지 귀를 기울이게 한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맨체스터법 이전에 모직물산업 관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가며 단일 집단이 독점권을 획득하려는 시도를 예방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명예혁명을 기념비적 사건이라 하는 것은 이처럼 권한이 커진 광범위한 연합세력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또 이 연합세력은 명예혁명으로 한층 더 힘을 키워 행정부의 권한은 물론 세력 내 일원들의 권한에도 제약을 가할 수 있는 헌정 질서를 마련할 수 있었다.
22. 고도로 절대주의적이고 착취적인 오스만제국의 제도를 고려하면 인쇄술에 대한 술탄의 적대감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책은 사고思考를 전파시키고 그만큼 백성을 통제하기 어렵게 한다. 어떤 사고는 경제성장을 증진할 수 있는 소중한 새로운 방법에 관한 것일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사고는 체제를 부정하며 기존의 정치 및 사회 질서를 뒤흔들어놓는 것일 수도 있다. 책은 또한 구두로 전해지는 지식에 대한 통제력도 약화시킨다. 글을 아는 누구라도 지식을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쇄술은 엘리트층이 지식을 장악하던 기존 질서를 파괴할 위협으로 여겨졌다. 오스만제국의 술탄과 종교 집단이 두려워한 것은 인쇄술이 초래할 창조적 파괴였다. 이들의 해법은 인쇄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23. 잉글랜드에서는 1688년 절대왕정 붕괴가 다원적 정치제도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더 효율적인 중앙집권정부의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절대왕정이 승리한 에스파냐에서는 정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왕실이 어떤 제약도 가할 수 없도록 코르테스를 무력화시키긴 했지만, 개별 도시와 직접 협상을 통해서도 세금을 걷기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잉글랜드 정부가 근대적이고 효율적인 조세 관료제를 수립하고 있을 때 에스파냐 정부는 이번에도 반대의 길을 걸었다. 왕실은 기업가의 사유재산권을 안정시키는 데 실패하고 무역을 독점했을 뿐 아니라 관직과 세금징수권을 매매해 세습시키기 일쑤였고, 한술 더 떠 면책특권까지 사고팔았다. 에스파냐의 이런 착취적 정치·경제 제도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쉽게 예측할 수 있다. 17세기 내내 잉글랜드는 상업적 성장에 이어 급속한 산업화 과정으로 이양하고 있었지만, 에스파냐는 제국 전반에 걸쳐 경제적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17세기로 접어들 무렵 에스파냐에서는 다섯 명 중 한 명이 도시 지역에 살았다. 17세기 말이 되자 에스파냐 인민이 갈수록 피폐해지면서 이 숫자는 열 명 중 하나로 줄어들었다. 잉글랜드는 날로 부유해지는데 에스파냐의 국고 수입은 추락했다.
24. 따라서 소말리아 사회에는 정치권력이 언뜻 다원주의적으로 비칠 정도로 폭넓게 분배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유재산권은 고사하고 질서 유지를 강제할 중앙집권정부가 없었기 때문에 광범위한 권력 분산이 포용적 제도로 이어지지 못했다. 누구도 다른 이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고 마침내 에티오피아 땅을 밟은 영국 식민정부를 포함해 누구도 강제로 질서를 잡지 못했다. 중앙집권정부의 결여로 소말리아는 산업혁명으로부터 어떤 수혜도 입지 못했다. 영국에서 유입되는 신기술을 채택하거나 그런 기술에 투자할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고 그러는 데 필요한 기구들을 설립할 형편도 아니었다.
25. 절대주의가 착취적 정치제도의 유일한 형태도 아니고, 산업화를 방해한 유일한 요인도 아니다. 포용적 정치·경제 제도가 마련되려면 일정 수준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져 정부가 법과 질서를 강제하고,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며, 필요할 때 공공 부문에 투자를 감행해 경제활동을 장려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심지어 오늘날도 아프가니스탄, 아이티, 네팔, 소말리아 등 수많은 나라에 가장 기본적인 질서 유지도 불가능한 정부가 들어서 있으며 경제적 인센티브는 씨가 말라버린지 오래다. 소말리아의 사례만 보아도 왜 이런 나라들이 산업화 과정을 건너뛰게 되었는지 잘 알 수 있다. 절대주의 정권이 변화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중앙집권화를 거부한 나라들이다. 변화를 허용하면 정치권력이 현재의 지배층에서 새로운 인물이나 집단에 이양될 것이라는 뿌리 깊은 공포가 작용한 것이다. 따라서 절대주의가 다원주의 및 경제 변화를 향한 행보를 가로막듯이 중앙집권정부가 없는 나라에서는 권력을 쥐고 있는 전통적인 엘리트층과 씨족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에 중앙집권화를 경험하지 못한 나라들이 산업화 시대에 가장 큰 불이익을 당한 이유다.
26. 네덜란드는 내친김에 반다제도 역시 손에 넣으려 들었다. 메이스와 육두구마저 독점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반다제도는 암본과는 사뭇 다른 구조로 되어 있었다. 저마다 자치를 하는 여러 소형 도시국가가 들어서 있었고 정치·사회적 신분질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상 작은 읍에 불과한 이들 소형 도시국가는 촌락 주민의 모임을 통해 운영되었다. 네덜란드가 독점조약 조인을 강요할 중앙당국도 없었고 메이스와 육두구의 공급을 완전히 장악할 만한 공물체제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칫 네덜란드가 영국, 포르투갈, 인도, 중국 상인과 경쟁하며 더 높은 가격을 치르지 않으면 향신료 경쟁에서 밀려날 판이었다. 메이스와 육두구를 독점하겠다는 애초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바타비아Batavia(네덜란드가 개칭한 자카르타의 옛 이름 - 옮긴이)의 네덜란드 총독이었던 얀 피터르스존 쿤Jan Pieterszoon Coen은 대안을 마련했다. 쿤은 1618년 자바 섬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새로운 거점으로 바타비아를 세웠다. 1621년에는 반다제도로 함대를 몰고 가 1만 5,000명에 달하는 거의 모든 주민을 학살했다. 지도자들도 나머지 주민과 함께 모조리 목숨을 잃었고, 메이스와 육두구 생산 노하우를 보전하는 데 필요한 소수만 살아남았다.
27.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위협을 피하고자 여러 나라가 수출용 작물 재배를 포기하고 상업 활동을 중단했다. 자급자족 정책을 견지하는 편이 네덜란드를 상대하는 것보다 안전했기 때문이다. 1620년, 자바 섬에 있는 반텐은 네덜란드의 침범이 두려워 후추나무를 죄다 잘라버렸다. 1686년, 마긴다나오Maguindanao를 방문한 한 네덜란드 상인은 이런 말을 들었다. “말라쿠에서처럼 여기서도 육두구와 정향을 기를 수 있다. 그런데 국왕이 죽기 전에 모조리 베어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네덜란드 회사가 향신료 때문에 싸움을 걸어올까 봐 걱정이 돼서다.” 1699년 마긴다나오에서 다른 무역상이 들었던 이야기도 비슷했다. “국왕이 후추를 재배하지 못하도록 했다. (네덜란드) 회사나 다른 강한 세력과 싸울 빌미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도시가 몰락한 것은 물론 인구도 줄었다. 1635년 미얀마는 해안지대이던 페구에서 이라와디Irrawaddy 강을 따라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는 아바Ava로 수도를 옮겼다. 네덜란드의 침략이 아니었다면 동남아시아가 정치·경제적으로 어떻게 발전했을지 모를 일이다. 독자적인 절대주의 체제를 구축하거나, 16세기 말엽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을 수도 있고, 포용적 제도를 점진적으로 받아들여 상업화에 박차를 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몰루카의 사례처럼 네덜란드 식민정책은 이들의 정치·경제적 발달 방향을 근원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동남아시아인들은 교역을 중단하고 내부로 움츠러들었으며 한층 더 절대주의적으로 변모했다. 향후 두 세기 동안 이들은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혁신을 활용할 형편이 아니었다. 또 종국에는 교역을 꺼린다고 해서 유럽인의 공세로부터 안전할 수도 없었다. 18세기 말엽이 되자 거의 모든 지역이 유럽 식민제국의 그늘에 있었다.
28. 노예무역은 두 가지 부정적인 정치 과정을 촉발했다. 첫째, 초반에는 한층 더 절대주의적으로 변모하는 정권이 많았다. 오로지 남들을 노예로 전락시켜 유럽인에 팔아넘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둘째, 첫 번째 과정의 결과이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정반대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전쟁과 노예무역은 궁극적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그나마 유지되던 질서와 정통성 있는 정부당국을 파괴해버렸다. 노예 획득 수단은 전쟁만이 아니었다. 납치하거나 소규모 공격을 통해 포로로 붙잡기도 했다. 노예를 만들기 위해 법까지 동원하는 지경이었다. 어떤 죄를 짓든 노예로 전락시켜 징벌했다.
29. 합법적 상업활동이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쟁탈전 이후 공식적인 식민지 시대가 도래해서도 노예제도는 근절되지 않았다. 유럽인은 노예제도를 퇴치하고 철폐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아프리카를 잠식했지만, 현실은 사뭇 달랐다. 아프리카 식민지 대부분 지역에서 노예제도는 20세기를 한참 지나서도 살아남았다. 가령 시에라리온에서 노예제도가 마침내 철폐된 것은 1928년이 돼서였다. 애초 수도 프리타운Freetown이 18세기 들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돌아온 노예의 안식처로 마련된 곳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프리타운은 노예제도 퇴치 임무를 띤 영국 함대의 본거지 역할을 했고, 영국 해군이 포획한 노예선에서 풀려난 노예의 새로운 고향이었다. 이런 상징적인 의미에도 시에라리온의 노예제도는 130년이나 더 지속되었다. 시에라리온 남쪽에 잇닿아 있는 라이베리아 역시 1840년대 아메리카 해방 노예를 위해 건설되었다(라이베리아Liberia는 자유liberty를 뜻하며, 수도 이름인 몬로비아Monrovia는 초기 정착을 주도한 미국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의 이름을 딴 것이다 - 옮긴이). 하지만 이곳에서도 20세기까지 노예제도가 사라지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까지도 25퍼센트에 달하는 노동력이 강압적으로 동원되어 혹사당했으며 노예나 다름없는 주거 및 노동환경에 시달려야 했다. 노예무역에 기반을 둔 착취적 정치·경제 제도 때문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산업화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고, 경제 발전을 이룩하던 세계의 여타 지역과 달리 경제가 정체되거나 오히려 퇴보하고 말았다.
30. 이중 경제는 자연 발생적인 것도, 불가피한 필연도 아닌 유럽 식민 지배 정책의 산물이었다. 원주민 자치지구가 가난하고 기술적으로 낙후되었으며, 주민의 교육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아프리카 경제성장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유럽인이 장악한 광산이나 토지에 값싸고 무지한 아프리카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부 정책의 소산이다. 1913년 이후 엄청난 수의 아프리카인이 백인이 차지한 자기들 땅에서 쫓겨나 자치지구에 꾸역꾸역 몰려들었지만, 독립적인 삶을 꾸려가기에는 워낙 좁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정부가 의도했던 대로 원주민은 백인 경제권에서 생계유지 수단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값싼 노동력을 공급하게 된 것이다. 경제적 인센티브가 바닥이 나자 이전 50년간 이루었던 성과 역시 모조리 원점으로 퇴보하고 말았다.
31. 미국과 마찬가지로 호주가 선택한 포용적 제도를 향한 길 역시 잉글랜드와는 달랐다. 내전과 명예혁명을 거치며 잉글랜드를 뒤흔들어놓았던 혁명이 미국이나 호주에서는 필요하지 않았다. 이들 나라의 건국 당시 상황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갈등 없이 포용적 제도가 떡하니 들어섰다는 뜻은 아니다. 미국은 포용적 제도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떨쳐버려야 했다. 잉글랜드에서는 오랜 역사를 거치며 깊이 뿌리박힌 절대주의 왕정을 제거하려면 혁명이 필요했다. 미국과 호주에서는 그런 장애물이 없었다. 메릴랜드의 볼티모어 경이나 뉴사우스웨일스의 존 맥아더가 그런 역할을 열망했을지는 모르지만, 이들의 야망이 결실을 볼 만큼 확고하게 사회를 장악하지 못했다. 미국과 호주에서 포용적 제도가 뿌리내렸다는 것은 두 나라에 산업혁명이 빠르게 확산되어 부가 쌓이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캐나다와 뉴질랜드 등 다른 식민지 역시 두 나라의 길을 따랐다.
32. 종합해보면 프랑스군이 유럽 대륙에 큰 고통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이들이 유럽의 형세를 획기적으로 뒤바뀌어놓은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봉건질서가 자취를 감추었고 길드가 무너졌으며 군주와 제후의 절대권력 역시 송두리째 흔들렸고 경제, 사회, 정치 등 모든 면에서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교회마저 맥을 못 추게 되었다. 태생적 지위에 따라 인민을 불평등하게 대우했던 앙시앵레짐의 기반이 무너진 것이다. 이런 변화 덕분에 해당 지역에서 훗날 산업화가 뿌리내릴 수 있게 해준 포용적 경제제도가 수립되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자, 프랑스가 장악했던 지역은 거의 예외 없이 산업화가 한창이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등 프랑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역이나, 폴란드와 에스파냐 등 프랑스의 점령 기간이 일시적이거나 제한적이었던 지역은 여전히 제자리걸음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33. 사회의 일부 계층이 아무런 제약 없이 타인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할 수 있게 되면, 그 타인이 헌트리지처럼 평범한 시민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균형은 위협받게 된다. 만약 농민이 공유지를 침범하는 엘리트층에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런 균형이 일시적으로 중단된다면, 나중에 또 그러지 말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그뿐만 아니라 또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상인, 사업가, 젠트리 계층이 반세기 동안 쌓아올린 것을 왕과 귀족이 도로 빼앗아간다 해도 막아낼 재간이 없지 않은가? 사실 그런 때가 오면, 이해관계가 같은 소수가 광범위한 연합세력을 밀어낼 것이기에 어쩌면 다원주의 기반 자체가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다. 정치체제는 이런 모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는다. 다원주의 및 이에 함축된 법치주의가 두고두고 영국 정치제도의 특징이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또, 일단 다원주의와 법치주의가 확립되고 나면 다원주의를 더 크게 확대하고 정치 과정 참여 기회도 더 늘려달라는 요구가 커지기 마련이다.
34. 시장이 소수 기업에 지배당하면 터무니없는 가격을 매기고 더 효율적인 경쟁자와 신기술의 진입을 막아버릴 수 있다. 시장을 그냥 내버려두면 포용적 색채를 잃고 갈수록 정치·경제적으로 힘이 있는 개인과 기업의 손에 휘둘릴 수 있다. 포용적 경제제도가 뿌리내리려면 단순히 시장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공평한 경쟁 환경과 대다수 참여자에게 경제적 기회를 조성해주는 포용적 시장이 필요하다. 엘리트층의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횡행하는 독점은 이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하지만 독점 트러스트에 대한 대응은 또한, 정치제도가 포용적이라면 포용적 시장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에 대항해 이를 상쇄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선순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포용적 경제제도는 포용적 정치제도가 꽃필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주며, 포용적 정치제도는 포용적 경제제도에서 일탈하려는 움직임을 억제한다.
35. 미국의 상·하원 역시 대통령이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한다면 정부체제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져 자신들도 무사하지 못할지 모르며 다원적 정치제도마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대로 두었으면 루스벨트는 입법부에서 과반수를 확보하려면 지나치게 많은 양보를 하고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고 판단해, 대통령령에 의한 통치rule by decree를 시도하며 다원주의 및 미국 정치체제의 토대 자체를 흔들어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의회는 당연히 이를 좌시하지 않았겠지만, 루스벨트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조치를 의회가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하며 대국민 호소에 나섰을 수도 있다. 내처 경찰력을 동원해 의사당을 봉쇄했을지도 모른다. 억측이라고 고개를 저을지도 모르지만, 1990년대 실제로 페루와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후지모리Alberto Fujimori 대통령과 차베스Hugo Chavez 대통령은 국민의 지지를 빌미로 말을 듣지 않는 의회를 폐쇄한 것은 물론 헌법까지 뜯어고쳐 대통령의 손에 막대한 권력을 몰아주었다. 다원주의적 정치제도하에서 권력을 공유하는 이들이 그런 파행이 거듭되는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에 1720년대 영국의 월폴도 법원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이며, 미 의회가 루스벨트의 법원 개혁안에 반기를 든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루스벨트에 제동을 건 것은 다름 아닌 선순환의 힘이었다.
36. 남부의 착취적 제도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노예제도가 아닌 흑인차별정책의 형태로 나타났다. 흑인차별정책을 뜻하는 Jim Crow라는 표현은 19세기 초 백인이 ‘흑인 분장’을 하고 공연했던 흑인 풍자 노래인 ‘점프 짐 크로Jump Jim Crow’의 한 구절에서 유래했는데, 훗날 1865년 이후 남부에서 발효된 흑인차별법령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차별정책은 시민운동이라는 또 다른 변혁이 시작될 때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흑인은 아무런 권리를 누리지 못한 채 억압 속에 신음해야 했다. 저임금에 의존하는 대농장 형태의 농업이 계속되었고, 교육수준이 낮은 노동력으로 미국 전체 평균에 비해 남부의 생산성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많은 이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착취적 제도의 악순환은 한층 더 고약했다.
37. 명예혁명과 프랑스혁명 이후 한결 포용적인 정치제도가 태동했는데, 세 가지 요인이 크게 이바지했다. 첫째, 신흥 상인 및 사업가 계층은 자신들에게도 이로운 창조적 파괴의 효과가 파급되길 바랐다. 이들은 혁명 연합의 주요 일원이었고 자신들에게 해가 될 게 뻔한 또 다른 착취적 제도의 발달을 바라지 않았다. 둘째, 명예혁명과 프랑스혁명 모두 광범위한 연합이 손을 잡았다. 가령 명예혁명은 소수 집단이나 편협한 특정 이해관계에 따른 쿠데타가 아니라, 상인, 산업가, 젠트리 계층 및 다양한 정치 세력이 지지한 운동이었다. 대체로 프랑스혁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셋째 요인은 잉글랜드 및 프랑스의 정치제도 역사와 맞물려 있다. 새롭고 한층 포용적인 정권이 발달할 수 있는 밑바탕을 만든 것이다. 양국 모두 의회와 권력 분점의 전통이 있었다. 잉글랜드는 마그나카르타, 프랑스는 명사회의 형태로 권력을 분점했다. 더욱이 명예혁명과 프랑스혁명은 절대주의 정권, 또는 그런 체제를 바라는 정권의 힘이 이미 쇠락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명예혁명이든 프랑스혁명이든 이런 정치제도 덕분에 새로운 지배층 또는 소수 집단이 정부를 장악하고 기존 경제 기반을 무너뜨려 지속 가능한 무소불위의 정치권력을 수립하기 어려웠다.
38. 사회학자 로베르트 미헬스가 제시한 과두제의 철칙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새로운 인물이 착취적 제도를 틀어쥐고 있던 정권을 전복한다 해도, 그들 또한 여전히 사악한 착취적 제도를 이용해 착취를 일삼으며 주인 노릇을 할 뿐이다. 이런 유형의 악순환 논리는 당시는 몰라도 시간이 흘러 돌이켜보면 오히려 간단히 이해할 수 있다. 착취적 정치제도하에서는 권력 집행에 대한 견제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전 독재자를 몰아내고 정권을 거머쥔 신진 세력이 권력을 사용하거나 남용하는 것에 제약을 가할 만한 제도 역시 생겨날 수가 없다. 착취적 경제제도하에서는 권력을 틀어쥔 세력이 남의 자산을 몰수하고 독점을 수립하는 등 엄청난 이윤을 챙기고 막대한 부를 누릴 수 있다. 물론 과두제의 철칙이 진정한 법칙은 아니다. 물리학 법칙처럼 늘 들어맞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잉글랜드의 명예혁명이나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보여주듯 불가피한 숙명을 뜻하지도 않는다.
39. 오늘날 국가가 실패하는 원인은 착취적 경제제도가 국민이 저축이나 투자, 혁신을 하겠다는 인센티브를 마련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로 득을 보는 세력의 권력을 강화해주는 식으로 이런 경제제도를 뒷받침해준다. 착취적 정치·경제 제도는 그 구체적인 내용은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를지 몰라도 국가가 실패하는 근본 원인일 수밖에 없다.
40. 20세기 말 세계의 여러 지역이 왜 그토록 가난에 찌들었는지 이해하려면 20세기 신新절대주의에 대해 알아야 한다. 바로 공산주의다. 마르크스는 불평등이 사라진 한결 인간적인 조건 속에서 번영을 일구어내는 체제를 꿈꾸었다. 레닌과 그의 공산당은 마르크스 이론에 감명을 받았지만, 이론과는 전혀 딴판으로 실천한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은 그야말로 피바다였고 인간적인 면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 평등 역시 기대하기 어려웠다. 레닌과 그의 측근은 가장 먼저 새로운 엘리트층을 만들었는데, 바로 자신들이 볼셰비키 당의 수뇌부에 앉은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이들은 비공산 불순 세력만 숙청하고 살해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할 만한 다른 공산당원까지 제거했다. 하지만 더 끔찍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전을 겪는가 싶더니 스탈린이 정권을 잡자 집산화와 잦은 숙청이 자행되어 최대 4,0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의 공산주의는 잔혹하고 억압적이었으며 피로 얼룩졌지만, 특이한 사례는 아니었다. 러시아 공산주의가 초래한 경제적 파탄과 인간적 고통은 다른 곳에서도 되풀이되기 일쑤였다. 가령 1970년대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하의 캄보디아, 중국, 북한이 전형적인 사례다. 사악한 독재정권이 들어섰고 인권 유린이 만연했다. 인간적 고통과 살육 이외에도 공산정권은 하나같이 다양한 형태의 착취적 제도를 수립했다. 시장이 있든 없든 이들이 수립한 경제제도는 오로지 주민으로부터 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마련되었고, 사유재산권을 죄악시함으로써 번영을 장려하기보다 가난만 초래하기 일쑤였다.
41. 오늘날 국가의 정치·경제적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은 착취적 제도를 포용적 제도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하므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며 과두제의 철칙이 불가피한 것도 아니다. 제도 내에 포용적 요소가 이미 어느 정도 존재한다거나, 기존 정권에 대한 투쟁을 이끌 광범위한 연합세력이 있다거나, 아니면 역사의 우발성만으로도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질 수 있다.
42. 사실 추장들은 소중한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는 로즈는 물론, 훗날 영국의 간접 통치 기간에도 빼앗기지 않은 것이었다. 19세기 무렵, 츠와나 부족은 핵심적인 정치제도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사하라 이남 기준으로는 이례적일 정도의 중앙집권화는 물론 언뜻 갓 탄생한 원시적인 형태의 다원주의로 비칠 만한 집단 의사결정 절차도 갖추고 있었다. 마그나카르타 덕분에 귀족이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잉글랜드 군주의 행동에 제동을 걸 수 있었듯이, 특히 크고틀라kgotla(부족 협의회) 같은 츠와나의 정치제도 역시 정치 참여를 장려하고 추장의 권한을 제한했다.
43. 이 역시 츠와나 부족민의 제도적 부동 과정과 기존의 제도, 식민 지배가 가져온 결정적 분기점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결과다. 세 츠와나 추장은 앞장서 런던으로 날아가 돌파구를 마련하며 운명을 스스로 개척했다. 추장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츠와나 부족의 중앙집권화 덕분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다른 부족 지도자들과 비교해 이례적이라 할 정도의 권한을 지니고 있었고, 부족의 전통적 제도에 깃든 얼마간의 다원주의적 요소 덕분에 남다른 수준의 정통성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44. 초반까지만 해도 보츠와나의 성장은 육류 수출에 의존했지만,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보츠와나는 천연자원을 관리하는 방식에서도 다른 아프리카 나라와 현저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식민통치 시절, 츠와나 추장들은 베추아날란드의 광물 탐사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유럽인이 귀금속이나 보석을 발견하면 자치는 물 건너 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최초로 대규모 다이아몬드 매장지가 발견된 곳은 세레체 카마의 고향인 은과토 부족의 땅이었다. 다이아몬드 발견 사실을 발표하기 전에 카마는 모든 지하 광물에 대한 권리가 부족이 아닌 국가에 귀속되도록 법을 바꾸었다. 보츠와나에서 다이아몬드 때문에 엄청난 부의 불평등이 초래되지 않도록 하려는 조치였다. 다이아몬드 관련 수입을 정부 관료체제와 사회간접자본 및 교육 투자 재원으로 활용이 가능했으므로 중앙집권화 과정도 한층 더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시에라리온과 다른 여러 사하라 이남 나라에서는 다이아몬드가 서로 다른 집단 간에 분쟁이 초래되고 내전이 끊이지 않는 원인이 되었다.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살육전으로 ‘피 묻은 다이아몬드Blood Diamonds’라는 오명이 생겨났을 정도다. 보츠와나는 다이아몬드 수입을 국익을 위해 사용했다.
45. 물론 우리의 이론은 어떻게 하면 국가가 번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착취적 제도에서 벗어나 포용적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밝혔듯이 그런 변화를 달성하는 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첫째, 악순환의 고리 때문에 생각보다 제도적 변화를 이끌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특히 착취적 제도는 과두제의 철칙에 따라 이런저런 탈을 쓰고 되살아나기 일쑤이다. 따라서 2011년 2월 민중봉기로 무바라크 대통령 정권이 무너졌다고 해서 이집트가 더 포용적인 제도의 길로 접어들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다. 역동적이고 희망에 찬 민주화 운동에도 착취적 제도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다. 둘째, 역사적 우발성을 고려하면 결정적 분기점과 기존 제도적 차이가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을 하든 반드시 포용적 또는 착취적 제도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으므로 포용적 제도를 향한 변화를 촉진할 만한 보편적 정책 제안을 마련하려는 시도는 무모하다. 그럼에도 우리의 이론은 여전히 정책 분석에 유용할 수 있다. 제도 변화에 관한 그릇된 가설이나 몰이해에 바탕을 둔 나쁜 정책적 조언을 가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간단한 해법을 도출해내려는 시도만큼이나 최악의 실수를 피하는 것도 중요하다(더 현실적이기도 하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중국의 성공적인 성장 경험을 바탕으로 ‘권위주의적 성장’ 모형을 정책적 대안으로 고려한다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다. 이런 제안은 분명 오해의 소지가 있다. 지금까지 중국의 성장은 또 다른 형태의 착취적 정치제도하의 성장에 불과하며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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