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헤르토흐 지음, 박병철 옮김
독서 기간 : 24.2.3 ~ 2.21
나의 한 줄 리뷰 : 호킹과 양자우주론을 소개하고 시간의 기원과 자연철학의 흐름을통해 깊은 깨달음을 주는 책.
하이라이트
1.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의 연구실로 이어지는 복도 바닥은 어두운 녹갈색이었다.
2. 자연과학을 파고들다 보면, 좋건 싫건 형이상학으로 빠지는 갈림길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이 갈림길에서 우리는 자연의 작동 원리를 발견하고, 과학에 가치를 부여하는 조건과 새로운 발견으로부터 형성될 세계관에 대하여 심오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우리는 “우주는 왜 생명체에 우호적인 곳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던 중 그와 같은 갈림길에 도달했다. 이것은 과학의 영역을 넘어 생명의 본질을 추구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본질은 곧 인간의 본질이므로, 호킹의 마지막 연구는 결국 인간의 기원을 탐구하는 연구였던 셈이다. 생명친화적인 우주에서 ‘지구의 관리인’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과연 어떤 의미인가? 호킹은 삶의 마지막 순간을 이 심오한 질문의 해답을 찾으면서 보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최종 이론은 과학의 값진 유산으로 남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3. “가장 큰 망원경의 접안렌즈도 사람의 눈보다 클 수 없다”는 희한한 상관관계가 얻어질 수도 있다. _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어록 중에서
4. 우주배경복사의 지역에 따른 온도 차를 분석해보면 우주는 탄생 직후에 아주 빠르게 팽창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팽창 속도가 점차 느려졌고, 최근 들어(약 50억 년 전부터) 팽창 속도가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우주의 역사에 감속팽창기팽창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기간가 존재한 것은 시공간의 척도에 따른 규칙이 아니라 예외적인 현상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우주가 생명친화적 특성을 갖는 데 일조했던 ‘우연한 사건’ 중 하나다. 팽창 속도가 점차 느려져야 물질이 한곳으로 뭉쳐서 은하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팽창 속도가 아주 느려서 우주가 거의 정지 상태에 놓인 기간이 없었다면, 은하와 별은 물론이고 생명체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5. 생명체의 탄생을 위해 우주가 행한 기적 중 가장 신기한 것은 단연 암흑 에너지다. 현재 관측을 통해 확인된 암흑 에너지의 밀도는 이론적으로 계산된 값보다 무려 10^-123배나 작다. 이것은 과학 역사상 이론과 관측값이 가장 큰 차이를 보인 불명예스러운 사례로 남아 있다. 암흑 에너지의 밀도가 이렇게 작았기 때문에 우주는 거의 80억 년 동안 팽창이 매우 느리게 진행되는 ‘진정기’를 겪었고, 그 후에 암흑 에너지가 다시 뭉쳐서 가속 팽창이 시작된 것이다. 1987년에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는 약간의 계산을 거친 후 “암흑 에너지의 밀도가 지금보다 100배쯤 컸다면(즉 이론값보다 10^-121배 작았다면) 범우주적 척력이 강하게 작용하여 은하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6. 다중우주론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우주에 적용되는 ‘메타법칙metalaw’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메타법칙으로는 수많은 우주 중 우리가 어떤 우주에서 살고 있는지 알아낼 수 없다. 바로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다중우주의 메타법칙과 우리 우주의 법칙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없는 한, 다중우주론은 검증 가능한 결과를 단 하나도 내놓지 못한 채 역설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만다. 다중우주론은 근본적으로 불확실하고 모호한 이론이어서 우리 우주가 어디쯤 있는지 알 길이 없고, 앞으로 무엇을 보게 될지 예측할 수도 없다. 그래서 다중우주는 식별번호가 없는 직불 카드나 조립 설명서가 누락된 이케아 옷장에 비유된다. 우주가 여러 개라면 우리 우주의 역할은 무엇이며, 그 방대한 공간에서 우리의 위치가 어디인지 당연히 궁금해지는데, 다중우주 가설은 여전히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7. 지동설이 알려지고 400년이 흐른 후, 카터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 새삼스럽게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전혀 특별하지 않다면, 자신이 관측한 우주를 잘못 해석할 여지가 있다. 우리가 생명친화적인 우주를 관측하게 된 진짜 이유는 자신이 ‘그런 우주’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8. 훗날 호킹 복사Hawking radiation로 알려진 이 입자의 흐름은 강도가 너무 약해서 관측될 수 없지만, 이런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물리학자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블랙홀이 복사 에너지를 방출하면 질량이 서서히 감소하다가 결국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블랙홀이 점점 작아지다가 마지막 남은 최후의 질량을 방출할 때, 그 안에 숨어 있던 방대한 양의 정보는 어떻게 될까? 호킹은 약간의 계산을 수행하여 이 정보가 블랙홀과 함께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을 확인한 후, “블랙홀은 궁극의 쓰레기통”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모든 형태의 정보는 물리적 과정을 거치면서 변하거나 섞일 수 있지만, 영구히 제거될 수는 없다”는 물리학의 기본 원리에 위배된다. 이로써 우리는 또 하나의 역설에 도달했다. 블랙홀은 양자적 과정을 거치면서 정보를 방출하거나 잃을 수 있는데, 정작 양자이론 자체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9. 1915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전역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아인슈타인은 마침내 중력을 상대론적으로 서술한 일반상대성 이론을 완성했다. 일반상대성 이론은 중력을 기하학적으로 서술한 이론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공간의 기하학적 구조’에 관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중력은 시공간을 구부러뜨리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즉, 질량과 에너지가 존재하는 곳에서 시공간이 휘어진다는 것이다.
10. “블랙홀 주변에 외부 세계와 블랙홀을 완전히 차단하는 경계면이 존재한다”는 슈바르츠실트의 주장은 일반상대성 이론 초창기에 심각한 혼란을 야기했지만, 지금은 정식으로 ‘사건 지평선event horizon’이라는 용어로 불리고 있다. 외부 물질이 이곳을 통해 블랙홀 안으로 유입될 수는 있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오면 물질은 물론이고 무형의 정보information나 빛조차 밖으로 탈출할 수 없다. 즉, 사건 지평선은 우주 최강의 베일에 싸인 ‘일방통행의 막’인 셈이다.
11. 3차원 구의 2차원 구면이 그렇듯이, 4차원 구의 3차원 초구에는 중심이 없고 경계도 없다. 당신이 초구의 어느 곳에 있건 간에, 눈에 보이는 공간은 완전히 똑같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우주에서 공간의 총 부피는 유한하다. 지구의 표면이 유한한 것처럼, 초구 우주에서 당신이 점유할 수 있는 ‘위치’의 수는 유한하다. 이런 우주에서 특정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면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지구 표면에서 임의의 방향으로 직진했을 때 원위치로 되돌아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게다가 우주가 변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아인슈타인은 초구를 항상 같은 형태로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방정식에 우주항 λ(람다)를 추가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우주상수cosmological constant다. 얼마 후 에드윈 허블Edwin Hubble의 우주팽창설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우주가 불변이라는 주장은 폐기되었지만, 아인슈타인의 우주상수는 “밀어내는 중력을 발휘하여 우주를 팽창시키는 암흑 에너지”의 후보로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2. 아인슈타인은 기하학적인 이유에서 우주상수항을 방정식의 좌변에 추가했지만, 그것을 우주의 에너지로 간주한 에딩턴과 르메트르는 방정식의 우변에 추가되기를 원했다. 시공간이 물리적 장이라면 다른 장들처럼 고유한 특성이 있어야 하는데, 에딩턴과 르메트르는 이 특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우주상수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주상수를 방정식의 우변에 도입하면 시공간은 에너지와 압력으로 가득 차게 된다. 우유 한 잔이 온도에 따라 다른 에너지를 갖는 것처럼, λ는 텅 빈 공간을 암흑 에너지와 음압陰壓, negative pressure 공간을 팽창시키는 압력으로 가득 채운다(에너지와 압력의 크기는 λ 값에 의해 결정된다). 르메트르는 그의 저서인 《팽창하는 우주L’univers en expansion》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λ를 도입하면 진공 상태의 에너지가 0에서 벗어나 모든 사건이 발생한다.”
13. 디랙과 르메트르는 복잡한 우주의 기원을 태초에 무작위로 일어난 양자 점프에서 찾음으로써, 우주의 시작을 인과율에 의존하지 않고 양자역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우주가 창조적인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양자 점프 덕분일지도 모른다.
14. 1950년대에 이르러 빅뱅 이론은 아무도 입에 담지 않는 사어死語가 되었는데, 사실 ‘빅뱅’의 탄생은 이렇다. 1949년에 영국의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이 BBC 라디오에 출연하여 기자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우주가 빵 터지면서big bang 태어났다는 것은 도저히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합리적 상상”이라고 주장하면서 빅뱅을 연구하는 천문가들을 사이비 과학자로 몰아세웠다.
15. 우주 공간에 남아 있는 빅뱅의 잔해를 마이크로파 우주배경복사라고 하는데, 이것은 1964년에 미국의 물리학자 아노 펜지어스Arno Penzias와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에 의해 발견되었다. 당시 가모의 연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펜지어스와 윌슨은 뉴저지주 홈델Holmdel에 있는 벨연구소에서 거대한 마이크로파 혼 안테나horn antenna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깨끗한 신호를 수신하고 싶은데, 안테나에 자꾸 잡음여기서는 소리가 아니라 원치 않는 잡신호를 의미이 잡혔다. 이상한 것은 안테나의 방향을 하늘의 어디로 향해도, 낮이건 밤이건 파장 7.35센티미터짜리 잡음이 항상 감지되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주변의 우주론학자들과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드디어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필요 없는 잡음이 아니라, 뜨거운 빅뱅이 남긴 복사였다. 르메트르가 예견하고 가모가 계산했던 빅뱅의 메아리가 펜지어스와 윌슨의 안테나에 잡힌 것이다.
16. 펜로즈는 일반상대성 이론이 옳다는 가정하에 “질량이 충분히 큰 별이 자체 중력에 의해 수축(붕괴)되면 시공간에 특이점이 형성되고, 이 특이점은 사건 지평선이라는 경계면에 가려 절대로 관측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다. 이 사건 지평선으로 가려진 영역은 훗날 ‘블랙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펜로즈의 논리에서 시간을 반대 방향으로 되돌리면 붕괴가 팽창으로 바뀐다. 호킹은 여기에 착안하여 팽창하는 우주는 과거에 특이점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는 펜로즈와 함께 연구를 진행하면서 일련의 수학 정리를 증명한 후, 이로부터 “팽창하는 우주의 역사를 거꾸로 되돌려서 최초의 별과 은하, 우주배경복사가 탄생하기 전으로 거슬러 가면 시공간이 휘어지다 못해 하나의 점으로 수축되는 특이점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17. 갈릴레이와 뉴턴 이후로 물리학은 두 종류의 정보에 기초한 이원론적 체계로 발전해왔다. 하나는 물리계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해가는 과정을 서술하는 운동 방정식이고, 다른 하나는 임의의 시간에 계의 상태를 간결하게 명시한 경계 조건boundary condition이다. 운동 방정식은 주어진 물리계가 과거에 어떤 상태였는지, 또 미래에 어떤 상태로 변할 것인지를 예측한다. 여기에 경계 조건을 추가하면 임의의 모든 시간에 계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물리학과 우주론이 과거를 추적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은 운동 방정식과 경계 조건을 적절하게 조합했기 때문이다.
18. 호킹의 특이점 정리는 일반상대성 이론과 양자이론 사이의 불화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우주의 탄생은 근본적으로 양자적 현상이며, 설계된 우주의 수수께끼를 과학적으로 해결하려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두 이론(일반상대성 이론과 양자이론)을 어떻게든 결합해야 한다”는 르메트르의 직관이 다시 한번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호킹의 요점은 두 이론을 결합하여 물리학의 예측 능력을 강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두 이론을 결합하려면 물리학의 기본 틀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19. 호킹은 “빅뱅 이전의 상황을 묻는 것은 남극의 남쪽에 무엇이 있는지 묻는 것과 같다”면서 자신이 제안한 양자우주론을 ‘무경계 가설no-boundary proposal’이라 불렀다. 호킹의 무경계 가설에는 양립하기 어려울 것 같은 두 가지 특성이 있다. 하나는 우주의 과거가 유한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순간”, 즉 우주의 시작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경계 가설에서 우주의 시작을 찾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는 게 좋다. 그런 것은 양자적 불확정성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20. 오래전부터 우주론학자들은 초기 우주의 온도가 모든 공간에 걸쳐 절대로 균일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우주의 온도가 균일하지 않으니,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오늘날 우주에는 은하와 은하단이 사방에 널려 있고, 이들 모두는 물질이 한 지역에 집중되면서 형성된 천체다. 만일 우주가 완벽하게 균일한 기체에서 시작되었다면 은하는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고, 은하가 없으면 생명체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시 플라스마의 밀도가 지역마다 아주 미세하게 달랐다면, 이 차이가 중력에 의해 증폭되면서 밀도가 높은 지역에 물질이 집중되어 은하와 같은 천체가 탄생할 수 있다. 팽창에 의한 퍼짐 효과와 중력에 의한 응집 효과가 서로 경쟁하면서 약 100억 년이 흐른 후에 지금과 같은 은하가 만들어지려면, 아기 우주의 지역에 따른 밀도 비율은 10만 분의 1 이상 차이가 나야 한다.
21. 1980년대 초에 이론물리학자 앨런 구스Alan Guth와 안드레이 린데, 폴 스타인하트, 안드레아스 알브레히트Andreas Albrecht 등이 제안한 인플레이션 이론은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빅뱅 이론의 가장 중요한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우주 초기에 중력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극강의 척력’(밀어내는 힘)으로 작용했다는 가정을 도입하여 팽창의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이었다. 인플레이션의 선구자들은 몇 단계의 계산을 거친 후에 태초의 우주가 몇 분의 1초 동안 10^30배로 커졌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원자 하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은하수만큼 커진 셈이다.
22. 1917년에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이론에 우주상수를 추가할 때, 그는 물질에 의한 인력(중력)과 우주상수에 의한 척력이 정확하게 상쇄되어 우주가 항상 같은 상태를 유지하도록 값을 인위적으로 조정했다. 그로부터 60년 후, 인플레이션 이론의 선구자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주 초창기에 인플라톤장이 발휘하는 반중력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잡아당기는 중력을 압도하여 빅뱅이 일어났다”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추상적이었던 빅뱅 이론이 한층 더 구체화된 것이다.
23. 인플레이션이 끝난 후 인플라톤의 에너지가 열에너지로 바뀌었을 때, 뜨거운 가스로 가득 찬 우주에 인플라톤장의 요동이 발자국처럼 남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우주가 인플레이션에서 탄생했다면, 복사 에너지의 온도와 물질의 분포에 작은 불규칙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후 우주가 서서히 팽창함에 따라 초기에 생겼던 잔물결이 우주 지평선 안으로 들어오면서 인간이 만든 관측 장비에 포착되었다. 멀리서 일어난 파도가 해변가에 도달하여 피서객의 시야에 들어온 것과 비슷하다. 우주배경복사의 온도에 나타난 작은 변화가 인플레이션 이론의 예측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4. 각거리에 따라 우주배경복사가 변하는 패턴을 알면 현재 우주의 구성 성분 비율과 앞으로 나타날 변화까지 예측할 수 있다. 배경복사 스펙트럼의 미세한 변화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방식에 따라 달라지지만, 우주 전체의 기하학적 구조와도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은 시공간의 기하학적 구조와 물질의 분포를 연결하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을 이용하여, 플랑크 위성의 데이터로부터 우주의 구성 성분과 관련된 다량의 정보를 추출할 수 있었다.
25. 그러나 인플레이션 이론이 내놓은 다양한 예측 중 ‘원시 중력파primordial gravitational waves’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공간이 급속하게 팽창하면 공간뿐만 아니라 양자 요동도 함께 증폭되기 때문에, 일정한 수준의 중력파가 발생한다. 물론 중성자별neutron star이 폭발할 때나 은하가 충돌할 때, 또는 블랙홀이 형성될 때에도 강력한 중력파가 발생하지만, 이것은 인플레이션이 종료되고 한참 후에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우주론학자들은 인플레이션의 여파로 발생한 중력파를 후대에 발생한 중력파와 구별하기 위해 원시 중력파로 부르고 있다. 원시 중력파는 우주가 탄생한 후 공간과 함께 꾸준히 확장되면서 파장이 엄청나게 길어졌을 것이므로, 지구에 설치된 L자형 감지기(라이고)로는 그 존재를 확인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팽창과 함께 생긴 중력파의 잔물결이 공간 속에서 출렁이다 보면 마이크로파 배경복사의 편광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26. 인플레이션 이론은 우주 초창기에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을 매우 성공적으로 설명했다. 물론 인플라톤의 물리적 특성이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원시 중력파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우주배경복사의 온도 분포가 이론에서 예측된 값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우주론학자는 인플레이션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인플레이션 이론은 느낌상으로도 옳고, 겉모습도 옳은 이론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것을 촉발한 원인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초기 우주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할 때, 하나의 수수께끼를 다른 수수께끼로 대치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원인 없는 인플레이션’은 빅뱅의 수수께끼를 인플레이션이라는 또 다른 수수께끼로 대치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플레이션이 제아무리 매력적인 이론이라 해도 그것이 일어난 원인을 설명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이 바로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27. 한편, 안드레이 린데와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미국 터프츠대학교의 물리학자 알렉산더 빌렌킨Alexander Vilenkin(그는 생각이 깊으면서 말수가 적은 사람으로 유명하다)은 인플레이션의 기원을 설명하는 또 다른 이론을 제안했다. 이들의 이론은 너무 파격적이어서 발표와 동시에 학계의 이목을 사로잡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말 많고 탈 많은 다중우주 가설이다. 린데와 빌렌킨은 인플레이션의 기원에 관한 문제를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하다가 “인플레이션은 우주가 겪는 기본 상태로서, 멈추기가 매우 어렵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인플레이션 팽창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이다.
28. 다중우주론은 모든 사건의 배경인 ‘영원히 팽창하는 공간’이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무경계 가설은 초기 우주에서 양자역학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배경(시공간의 구조)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고 주장한다.
29. LHC는 고리 모양의 입자 가속기로서, 입자물리학의 최신 이론인 표준 모형을 검증하기 위해(특히 힉스 입자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건설된 세계 최대 규모의 실험 장치다. 스위스와 프랑스 접경지역에 거대한 지하터널 형태로 매립된 LHC는 둘레가 27킬로미터에 달하며, 그 안에서 양성자proton와 반양성자antiproton가 각기 반대 방향으로 광속의 99.9999991퍼센트까지 가속된다. 이 두 가닥의 초고에너지 입자빔이 고리 주변에 설치된 세 개의 입자 검출기에서 정면으로 충돌하면 온도가 100만×10억 도(10^15도)까지 상승한다. 이 정도면 빅뱅 직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유지되었던 우주의 환경과 비슷하다. LHC의 대표적인 입자 검출기로는 ATLAS와 CMS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레고 블록처럼 쌓아놓은 수백만 개의 고감도 센서가 격렬한 충돌의 와중에 생성된 입자의 궤적을 추적하고 있다.
30.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과 그들 사이에 작용하는 세 가지 힘을 설명하는 이론 체계를 표준 모형이라고 한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에 걸쳐 개발된 표준 모형은 물질 입자(물질을 구성하는 입자)와 힘을 공간에 퍼진 장場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양자장 이론QFT, quantum field theory이다(장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표준 모형에 의하면 전자와 쿼크 같은 물질 입자는 공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작은 당구공이 아니라, 양자장이 국소적으로 들뜨면서 나타난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물질 입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역장力場, force field이 들뜨면서 나타난 입자는 위에 열거한 힘을 매개하는 입자로서, 이들을 통틀어 ‘보손boson’이라 한다. 예를 들어 전자기력을 매개하는 광자는 전자기장이 들뜨면서 생긴 “입자를 닮은 양자”다.
31. 힉스 보손은 초기 우주의 인플라톤장과 같은 스칼라장인 힉스장의 양자에 해당하며, 처음 제기되었을 때부터 모든 공간에 퍼져 있을 것으로 예측되었다(이런 점에서 보면 과거에 폐기된 에테르의 현대식 버전이라 할 수 있다). 힉스장은 다른 모든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기 때문에, 표준 모형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표준 모형에 의하면 매개입자는 물론이고 심지어 전자와 쿼크까지도 고유의 질량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모든 공간에 퍼져 있는 힉스장을 통과할 때 일종의 저항을 받으면서 질량을 획득하게 된다.
32. 빅뱅의 초고온 용광로에 표준 모형을 적용하여 얻은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주가 태어나던 순간에 입자의 질량과 힘의 세기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값과 완전히 달랐으며, 공간이 팽창하고 온도가 내려감에 따라 대칭이 붕괴되면서 지금과 같은 우주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발견이다. 팽창의 초기 단계에서 물리법칙의 기본 구조가 우주와 함께 진화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입자물리학의 법칙들은 팽창의 와중에 에너지와 온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환경에서만 적용된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이 법칙을 ‘유효법칙effective laws’이라 부르고 있다.
33. 대칭 붕괴 메커니즘 및 이와 관련된 (힉스장과 유사한) 장은 표준 모형의 확장 버전인 대통일 이론GUTs, Grand Unified Theories의 일부다. ‘통일’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GUT에서 약전자기력과 강력이 하나의 힘으로 통일되기 때문이다. GUT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개념은 대칭을 통해 정의되는데, 그 원조는 아인슈타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05년에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 이론에 대칭 원리를 적용하여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통일했다. 이때 탄생한 개념이 바로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묶은 4차원 시공간이다. 당시 헨드릭 로런츠Hendrick Lorentz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아인슈타인이 도용했다며 불만을 토로했지만, 역사는 아인슈타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후로 추상적인 수학적 대칭은 물리학 이론을 떠받치는 기본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된다.
34. 고대 그리스어로 “보이지 않고, 쪼갤 수 없는 물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원자atom는 종류가 90여 가지나 되지만, 끈이론에서 말하는 끈은 단 하나뿐이다. 입자의 종류에 상관없이 모든 끈은 물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다. 모든 종류의 입자에 똑같은 끈이 숨어 있는 것이다. 종류를 차별하지 않는 평등주의적 관점은 통일의 철학에 잘 부합되는 것 같다. 그런데 똑같은 끈이 어떻게 질량과 스핀, 전하 등이 제각각인 입자 무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인가? 답은 끈은 진동하는 모드에 따라 각기 다른 입자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끈이론에 의하면 전자와 쿼크는 물론이고 심지어 광자와 같은 매개입자(보손)도 끈이 고유한 모드로 진동한 결과다. 첼로의 줄이 진동수에 따라 각기 다른 음을 내는 것처럼, 끈은 다양한 모드로 진동하면서 입자 동물원에 입주한 모든 종류의 입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35. 끈이론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중력(일반상대성 이론)과 양자이론은 상반된 내용을 담은 두 권의 책처럼 절대 양립할 수 없는 별개의 이론으로 보였다. 그러나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난 끈이론 덕분에 이론물리학자들은 20세기 물리학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을 조화롭게 합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더욱 바람직한 것은 끈이론의 체계 안에 두 기둥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끈이론을 크고 무거운 물체에 적용하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 방정식이 도출되고, 에너지가 유별나게 크지 않은 몇 개의 끈에 적용하면 양자장 이론이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끈이론의 기본 구조는 아직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
36. 끈이론의 가장 큰 단점은 이론 전체를 아우르는 운동 방정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상대성 이론에는 장 방정식이 있고 양자역학에는 슈뢰딩거 방정식, 상대론적 양자역학에는 디랙 방정식이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끈이론 방정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끈이론으로 자연의 법칙을 통일하려면 꽤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옛날부터 3차원이라고 하늘같이 믿어왔던 공간을 무려 9차원으로 확장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언뜻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끈이론의 배경 수학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이 황당한 제안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공간이 9차원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친숙한 세 가지 방향인 전후(길이), 좌우(폭), 상하(높이) 외에 여섯 개의 방향이 추가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37. 끈이론은 우주의 역사에서 엄청나게 많은 분기점을 발견하여 다중우주 가설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과거에 린데와 빌렌킨이 다중우주를 처음으로 제안할 때, 섬우주의 구조와 구성 성분이 제각각이라는 점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개중에는 수십억 개의 은하가 생성될 정도로 다량의 물질이 존재하는 섬우주도 있고,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섬우주도 있다. 그러나 다중우주에 끈이론이 개입되자 섬우주의 다양성이 거의 무한대로 치솟았다. 영원히 팽창하는 코스모스에서 다중우주의 종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아진 것이다. 개개의 섬우주는 팽창과 냉각을 겪으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탄생의 흔적”을 남겼고, 다중우주는 끈이론의 보이지 않는 메타법칙에 의해 변화무쌍한 코스모스가 되었다.
38. 2000년대 초에 관측과 이론 및 λ에 대한 인류학적 논리가 하나로 합쳐지면서(이 세 가지는 각자 나름대로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인류학적 다중우주론’이 탄생했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한 우주론학자들은 서스킨드가 생각했던 미세 조정 문제를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다중우주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우리 우주 근처에는 생명체에게 적합한 법칙으로 운영되는 다른 섬우주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을 것이다. 물론 생명체는 그런 섬우주에만 존재할 수 있다. 생명친화적이지 않은 다른 섬우주들은 우리에게 관측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지구의 천문학자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는 곳을 애써 관측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 원리는 다중우주에서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섬우주를 골라내는 역할을 한다. 그런 우주가 아무리 희귀하다 해도, 일단 우리 우주에 생명체가 살고 있으니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셈이다.
39. 물리학과 천문학에서 “관찰자가 탐구 대상을 전지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를 아르키메데스 점Archimedean point이라고 하는데, 이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였다. 이 아이디어에서 새로운 과학이 탄생하여 세상을 바꿀 때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지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이 전반적으로 수용되어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불이 붙을 때까지는 불과 수십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40. 에버렛의 가설은 슈뢰딩거의 방정식에 기초하고 있어서 수학적으로 매우 우아하다. 그의 이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보어의 해석이 “용량을 초과한 수하물”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위 시스템이 서로 얽혀서 범용 파동함수가 결어긋난 가지로 분리되는 과정은 양자적 관측에 대하여 매우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한다. 에버렛의 가설에서 인간의 의식과 인간이 행하는 실험 및 관측은 이론과 완전히 무관하지 않으며, “이곳과 다른 법칙을 따르는 외부의 객체”로 취급되지도 않는다. 이들은 그저 양자역학적 환경의 일부일 뿐이어서, 근본적으로 공기 분자나 광자와 동일하게 취급해도 무방하다. 에버렛은 양자 세계의 안과 밖을 뒤집어 생각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우리는 우주의 양자 파동을 해변가에서 바라보는 구경꾼이 아니라, 그 파동을 타고 움직이는 적극적 구성원이었다.
41. 에버렛이 제안한 범용 파동함수universal wave function의 개념은 우주 전체를 양자적으로 생각하는 양자우주론의 초석이 되었다. 그가 생각한 우주는 복제되거나 더 큰 상자에 들어가는 우주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물리계였다. 또한 에버렛은 전지적 관점이 아닌 벌레의 관점에서 새로운 양자우주론을 구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그의 이론은 호킹의 케임브리지 연구팀을 비롯하여 수많은 물리학자가 추구하는 양자우주론의 토대가 되었다.
42. 우리는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을 실제로 일어나게 만드는 과정에 어쩔 수 없이 관여하고 있다. 우리는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이며, 어떤 면에서 볼 때 우주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참여 우주’다.
43. 양자우주의 역사는 이미 일어난 사건이 순차적으로 배열된 일상적인 역사가 아니라, “우리(관찰자)”와 “이제 와서 밝혀진 과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놀라운 역사다. 이 하향식 요소는 관찰자에게 (양자적 의미에서) 과거를 창조하는 능력을 부여한다. 우주의 역사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우리(관찰자)는 문자 그대로 “우주의 역사를 만드는 주인공”인 셈이다.
44. 전지적 관점 대신 벌레의 관점을 택한 하향식 우주론은 안과 밖을 뒤집고 시간에 역행하는 논리를 펼친다. 이로부터 얻은 결과는 “무경계 파동의 형태가 극적으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하향식 접근법은 텅 빈 우주에 해당하는 파동 조각을 파동의 꼬리 부분으로 옮기고, 강력한 인플레이션으로 탄생한 우주를 증폭시킨다. 상향식 관점에서 바라본 무경계 파동과 비교해보면, 하향식 우주론에서 파동함수를 구성하는 가지가 완전히 다르게 섞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각 파동 조각의 높이는 상대적인 확률을 나타내므로, 하향식 우주론은 우리 우주처럼 강력한 인플레이션으로 시작된 우주를 재현한다. 이와 같은 결론이 내려지자 호킹은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것 보세요. 무경계 가설이 무언가 큰일을 해낼 것 같았다니까요!”
45. 물론 하향식 우주론도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위치는 19세기 다윈의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뜨거운 빅뱅에서 법칙의 나무가 자라난 과정을 서술하기에는 데이터가 너무 부족하다. 머나먼 과거사를 간직한 화석은 아직도 작은 파편으로 사방에 흩어져 있다. 우주의 95퍼센트를 차지하는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를 생각해보라. 과거에 이들을 낳은 대칭 붕괴는 과연 어떤 형태로 진행되었을까? 오직 시간만이 그 답을 알려줄 것이다.
46. 하향식 우주론에서는 생물학의 계통수(생명의 나무)가 그랬던 것처럼, 물리법칙의 계통수도 시간의 역방향으로 추적해야 이해할 수 있다. 하향식 우주론으로 선회한 후 호킹에게 중요한 것은 “우주는 왜 지금과 같은 형태인가?”(초월적 원인에 의해 결정되는 근본적 특성)가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지금 이곳에 도달하게 되었는가?”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것의 출발점은 “생명체에 알맞도록 세팅된 우주”다. 하향식 트립티크는 중력과 양자역학(큰 것과 작은 것)뿐만 아니라 역학과 경계 조건, 우주에 대한 벌레의 관점을 서로 연결함으로써, 우주론을 아르키메데스 점(전지적 관점)으로부터 멀리 떼어놓았다.
47. 호킹은 《시간의 역사》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누군가가 만물의 이론을 발견한다 해도, 그것은 방정식과 법칙의 집합일 뿐이다. 방정식에 생명을 불어넣는 원천은 무엇인가?” 하향식 철학으로 전환한 호킹의 대답은 “관찰자observership”였다. 우주가 우리를 창조했듯이, 우리도 우주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48. 가장 최근에 제기된 홀로그램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시공간의 얇은 조각에 숨겨진 현실이 4차원 시공간에 투영된 결과다. 어딘가에 존재하는 원형原形이 이 세상에 투영되어 휘어진 시공간과 중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곧 현실을 서술하는 또 다른 방법이 존재한다는 뜻이며, 양자적 입자와 장으로 이루어진 3차원 그림자 세계에 우주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21세기의 홀로그램 물리학은 “어딘가에 숨겨진 홀로그램을 해독할 수만 있다면, 물리적 실체의 가장 깊은 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49. 블랙홀의 저장 용량은 부피가 아닌 표면적에 의해 결정된다. 마치 블랙홀에 ‘내부’라는 것이 없으면서, 블랙홀 자체가 홀로그램인 것과 같다.
50. ‘String 95’ 학회에서 에드워드 위튼이 ‘끈 역학에 대한 몇 가지 논평Some Comments on String Dynamics’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시작할 때, 그는 가사 상태에 빠진 끈이론을 살려내겠다는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으며, 그런 기적을 기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강연은 정말 한 편의 드라마처럼 끈이론을 극적으로 살려냈다. 물리학사에 길이 남을 이 강연에서 위튼은 끈이론을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는데, 그의 논리에 의하면 다섯 개의 끈이론에 초중력을 포함한 여섯 개의 이론은 사실은 별개의 이론이 아니라 동일한 수학적 구조의 다른 얼굴일 뿐이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위튼은 여러 개의 이론을 하나로 연결하는 복잡한 수학적 네트워크를 ‘M 이론’으로 명명했다.
51. 홀로그램 이중성에 의하면 일반상대성 이론과 양자이론은 하나의 물리적 현실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서술한 이론이다. 주어진 물리계는 양자계일 수도 있고, 차원이 다른 중력계일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말다세나의 이중성이 몰고 온 놀라운 관점의 변화다.
52. 블랙홀이 탄생한 후 충분히 긴 시간이 지나면, 블랙홀의 과거와 현재 상태에 관한 정보는 블랙홀의 기하학적 구조에 저장되지 않고 새로운 시공간에 저장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향식으로 전향한 호킹은 자신이 젊었을 때 시공간을 이미 주어진 양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계산을 해보기도 전에 실수를 저질렀다고 인정했다.(속으로 울면서 원치 않는 겨자를 삼켰을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또 다른 기하학적 구조가 존재한다는 그의 생각은 결국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단 하나의 기하학 대신 “내부 기하학의 합”이라는 양자적 개념을 도입하면 난공불락이었던 블랙홀의 역설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호킹의 더블린 강연이 숱한 논쟁을 야기한 이유는 블랙홀의 과거가 저장될 수 있는 시공간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3. 페닝턴과 현악사중주단은 블랙홀에서 증발하는 입자와 내부로 빨려 들어간 입자 사이의 얽힌 관계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쌓이다 보면 사건 지평선을 가로지르는 웜홀로 발전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이들의 이론은 수많은 물리학자에 의해 재검증되었다).
54. 홀로그램 이중성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이 “낮은 차원의 경계면에서 이동하는 수많은 양자적 입자의 집단적 얽힘”이 낳은 결과임을 말해주고 있다. 반-드지터 공간에서 서로 인접한 영역들은 경계면에서 “고도로 얽힌” 부분에 해당하며, 멀리 떨어진 영역은 경계면에서 “얽힌 정도가 덜한” 부분에 속한다. 또한 구성 요소 사이의 얽힌 관계에 어떤 규칙적인 패턴이 존재하는 표면에는 텅 빈 내부 공간이 대응되고, 모든 입자가 혼돈계를 방불케 할 정도로 어지럽게 얽힌 표면에는 블랙홀을 보유한 내부 공간이 대응된다. 그리고 누군가가 블랙홀의 과거를 알아내기 위해 양자적으로 얽힌 큐비트qubit 양자정보의 최소 단위. 전자식 컴퓨터의 비트와 달리 동시에 여러 개의 값을 가질 수 있다를 이용하여 복잡한 연산을 수행하면, 놀랍게도 이에 대응하는 내부 공간에는 웜홀이 존재하게 된다.
55. 홀로그램은 우주의 진화 과정과 중력을 3차원 경계면에 20여 종의 양자적 상호작용으로 새겨넣음으로써, 시간이라는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홀로그램 우주에서 시간은 일종의 환영일지도 모른다.
56. 홀로그램 우주론에서 시도할 수 있는 과거 여행 중 하나는 홀로그램에 대하여 모호한 관점을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상을 축소하는 것과 같다. 말다세나의 이중성에서 큰 스케일의 표면 홀로그램을 고려하면 반-드지터 공간의 깊은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반-드지터 공간의 중심에 놓인 개체는 홀로그램 전체에 걸친 장거리 상호 관계로 투영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팽창하는 우주의 홀로그램은 표면세계에서 긴 거리에 걸쳐 분포된 큐비트에 우주의 과거를 투영한다. 홀로그램에 담긴 정보를 양파 껍질 까듯이 차례로 벗겨나갈수록 더욱 먼 과거로 이동하게 되고, 결국에는 아주 먼 거리를 두고 얽힌 몇 개의 큐비트만 남게 될 것이다. 홀로그램의 관점에서 볼 때, 우주가 탄생하는 순간은 등골이 가장 오싹한 순간이다. 그 시점에 도달하면 얽힌 큐비트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곳이 바로 시간의 기원이다.
57. 홀로그램 우주론에 의하면 시간이 공간으로 바뀌는 것은 우리의 과거 여행이 빅뱅에 도달했을 때 물리학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홀로그램에서 무경계 가설은 “시작의 법칙”이 아니라 “법칙의 시작”에 가깝다. 그렇다면 빅뱅의 궁극적 원인은 어떻게 되는가? 더 생각할 게 없다. 질문 자체가 증발해버린다.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은 법칙 자체가 아니라, 법칙이 갖고 있는 “변하는 능력”이다.
58.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 알아낸 모든 것과 세상에 행한 모든 행위는 결국 인간의 발견이며 인간의 노력이다. 우리의 생각이 제아무리 추상적이고 그 영향이 아무리 넓은 곳에 미친다 해도, 우리 이론과 행동은 지구라는 행성의 조건과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다. 그래서 아렌트는 인간성이 모든 과학기술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과학이 낳은 새로운 세계관은 지구 중심적이면서 인간 중심적인 색채를 띠게 될 것이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거나 인간이 다른 존재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다. 지구가 인간의 중심이자 고향이기 때문에 지구 중심적이 될 것이고, 과학적 행위가 펼쳐지는 기본 조건에 자신의 유한성을 포함시켜야 하기 때문에 인간 중심적이 될 것이다.
59. 호킹은 인과율에 입각한 상향식 접근법을 추구하던 시절에 “우주는 무에서 창조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최종 이론을 구축하면서 빅뱅 무렵의 시공간에 대해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태초의 무는 우주가 탄생할 수도, 탄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텅 빈 진공이 아니라, 시공간과 무관하고 심지어 물리법칙과도 무관한 인식론적 지평선에 가깝다”고 주장한 것이다. 호킹의 최종 이론에서 ‘시간의 기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작점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과거의 한계점이다. 이 관점은 시간 차원(진화에 반드시 필요한 물리량으로, 환원주의적 개념의 전형)이 우주의 창발적 특성이라는 홀로그램과도 일맥상통한다. 홀로그램의 관점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홀로그램 영상이 점점 흐릿해지는 것과 같아서, 먼 과거로 갈수록 정보가 점점 더 많이 유실된다.
60. 지금 우리는 역사상 ‘가장 자연에 가까운 관점’을 갖고 자연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중요한 순간에 와 있다. “우리는 신이 아니라 지구를 타고 떠도는 탑승객”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이 그 어느 때보다 가슴속 깊이 와닿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에서 그 변화를 초래하는 주인공이며, 우리 자신이 진화 그 자체다. 아렌트가 말한 “세상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인간과 생명계의 상호 관계를 재정립하여 안전한 미래를 확보하려면, 우리 모두 행성의식planetary consciousness 자신이 지구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인식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 지구의 관리자라는 사실과 그에 따르는 한계를 깊이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를 위협하는 힘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61. 호킹이 평생을 두고 추구해온 이념은 2018년 6월 15일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된 그의 안치식에서 우주로 전송된 그의 작별 메시지에 잘 요약되어 있다.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입니다. 분열되지 않은 ‘하나’만이 눈에 들어올 뿐입니다. 그 단순한 풍경은 우리에게 하나의 행성, 하나의 인류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경계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리는 국적과 인종을 떠나 세계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다가올 미래를 ‘꼭 한 번 방문하고 싶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 우리는 호킹에게서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니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는 생의 대부분을 몸속에 갇힌 채 살았으나,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