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독서 기간 : 26.3.23 ~ 4.2
나의 한 줄 리뷰 : 우직한 인생이 주는 담담하고 답답한 느낌과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
하이라이트
1.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들이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중세 문헌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문헌은 지금도 희귀서적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영문과 교수 윌리엄 스토너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의 동료들이 미주리 대학 도서관에 기증.”
2. 늦가을의 쌀쌀함이 그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창백한 하늘 아래 둥글게 말리거나 비틀려 있는 나무들의 벌거벗은 가지가 보였다. 수업에 들어가려고 서둘러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학생들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이 중얼거리는 소리, 돌로 포장된 길에 신발이 또각또각 닿는 소리가 들리고, 추위에 발갛게 변한 채 가벼운 산들바람을 피해 수그린 얼굴들이 보였다. 그는 호기심에 차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들이 자신과 아주 멀지만 또한 아주 가까운 존재인 것 같았다. 그는 이런 느낌을 간직한 채 서둘러 다음 강의에 들어갔다. 토양화학 교수가 강의를 하는 동안에도 필기하고 외워야 할 내용을 불러주는 단조로운 목소리에 맞서 그 느낌을 간직했다. 이 강의의 내용을 외우는 고된 과정이 점점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해 2학기에 윌리엄 스토너는 기초교양 강의들을 빼버리고, 농과대 커리큘럼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철학과 고대역사의 기초강의 한 개씩과 영문학 강의 두 개를 들었다. 여름에 그는 다시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했지만 대학에서 어떤 공부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3. “나는 모르겠다.” 아버지가 말했다. 지치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널 이곳에 보내는 것이 나로서는 널 위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네 어머니랑 나는 언제나 너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압니다.” 스토너가 말했다. 더 이상 부모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두 분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올여름에 돌아가서 한동안 일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네 생각에 꼭 여기 남아서 공부를 해야겠거든 그렇게 해야지. 네 어머니랑 나는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다.”
어머니는 그의 정면에 있었지만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눈을 꾹 감고 무겁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은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져 있고, 주먹 쥔 손은 양뺨을 누르고 있었다. 스토너는 어머니가 소리 없이 마음 깊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좀처럼 울지 않는 사람이라 어색해하면서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스토너는 어머니를 조금 더 지켜보다가 무겁게 일어서서 거실을 벗어났다. 좁은 계단을 통해 자신의 다락방으로 올라간 그는 침대에 누워 어두운 허공을 뜬눈으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4. 그가 다시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두 사람을 향해 빙긋 웃었다. “우린 모두 가엾은 톰(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 왕〉에서 글로스터 백작의 아들 에드가가 변장한 인물 - 옮긴이)이고, 차갑게 식었어.”
“리어 왕이군.” 스토너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3막 4장.” 매스터스가 말했다. “그러니까 신의 섭리인지 사회인지 운명인지, 하여튼 그것이 우리를 위해 이 누옥을 지어준 거야. 우리가 폭풍을 피할 수 있게. 대학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걸세.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학생들이나 이타적인 지식추구나 그밖에 사람들이 말하는 이런저런 이유를 위해서가 아니야. 우리가 이런저런 이유를 내놓고 평범한 사람들, 그러니까 세상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을 몇 명 받아들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그저 보호색일 뿐이지. 중세 교회가 평신도는 물론이고 심지어 신에 대해서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살아남기 위해 가장을 하는 걸세. 우리는 살아남을 거야. 반드시 그래야 하니까.”
5. “나는 1860년에 태어났네. 반란의 전쟁(주로 북부 사람들이 남북전쟁을 부르던 이름 - 옮긴이)이 일어나기 직전이지. 물론 나는 그 전쟁의 기억이 없네. 너무 어렸으니까. 내 아버지도 내 기억 속에 없어. 전쟁 첫 해에 샤일로 전투에서 전사하셨거든.” 그가 재빨리 스토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네. 전쟁은 단순히 수만 명, 수십 만 명의 청년들만 죽이는 게 아냐.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 마음속에서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뭔가가 죽어버린다네. 사람이 전쟁을 많이 겪고 나면 남는 건 짐승 같은 성질뿐이야. 나나 자네 같은 사람들이 진흙탕 속에서 뽑아낸 그런 인간들 말일세.” 그는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학자에게 평생 구축하고자 했던 것을 파괴하라고 해서는 안 되네.”
6. 그는 1918년 봄에 박사학위 필수과정을 모두 마치고 그해 6월에 학위를 받았다. 그보다 한 달 전, 장교 훈련학교를 거쳐 뉴욕시 바로 외곽의 훈련소에 배치된 고든 핀치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가 여가 시간을 이용해서 컬럼비아 대학에 다니는 것을 허락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곳에서 그 역시 박사학위 필수과정을 그럭저럭 마치고, 여름에 그곳 사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될 예정이라고 했다.
편지에는 또한 데이브 매스터스가 프랑스로 파견되었으며, 입대한 지 거의 1년 만에 미국의 첫 작전에 참가했다가 샤토 티에리에서 전사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7. “자네도 많은 동료들이나 적잖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내 강의들을 상당 부분 포기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뻐하겠지? 포기하는 강의 중에는 학생들한테 별로 인기는 없지만 내가 좋아하던 강의도 있네. 2학년 영문학 개론. 자네도 기억할 텐데?”
스토너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슬론이 말을 이었다. “그럴 줄 알았네. 그걸 나 대신 자네가 맡아주면 좋겠네. 뭐, 커다란 선물로 주는 건 아니고, 학생 때 공부를 처음 시작했던 곳에서 교수로서 공식적인 첫 발을 내딛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어서 말이야.” 슬론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전쟁 전에 그랬던 것처럼 눈빛이 밝고 강렬하게 반짝였다. 그러더니 무심함이 다시 막처럼 내려앉았다. 슬론은 스토너에게서 시선을 돌려 책상 위의 서류들을 뒤적였다.
이렇게 해서 스토너는 처음 시작한 곳에서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 키가 크고, 깡마르고, 구부정한 소년의 모습으로 자신을 지금의 이 길로 이끌어준 강의에 귀를 기울이던 바로 그 강의실에서 키가 크고, 깡마르고, 구부정한 남자의 모습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예전에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흘깃 바라보며, 매번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 있지 않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곤 했다.
8. “날 소개해 달라고 했네.” 스토너가 말했다. 얼굴이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자네가 아는 아가씨인가?”
“물론이지.” 핀치가 말했다. 히죽 웃고 싶은지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학장님의 사촌뻘인 아가씨인데, 친척 아주머니를 만나러 세인트루이스에서 왔다네.” 그의 미소가 커졌다. “이런, 이런, 빌. 대단하군. 내가 소개해 주겠네. 이리 오게.”
그녀의 이름은 이디스 엘레인 보스트윅이고, 세인트루이스에서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지난 봄 그곳에서 젊은 숙녀들을 위한 사립학교 2년 과정을 마쳤으며, 지금은 어머니의 언니인 이모를 만나러 몇 주 동안 컬럼비아에 와 있었다.
9. 처음 시간을 함께 보낸 그날 저녁 이후로 두 사람은 각자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묘할 정도로 입에 담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마음속 침묵으로부터 데리고 나올 수 없었다. 그런 시도를 해보다가 그녀가 곤혹스러워하면 그는 시도를 그만두었다.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편안한 분위기가 있기는 했다. 그는 자신과 그녀가 어느 정도 서로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세인트루이스로 돌아갈 날까지 이제 채 일주일도 남지 않았을 때, 그는 사랑을 고백하며 그녀에게 청혼했다.
10. 호러스 보스트윅이 그녀의 ‘젊은이’와 좋은 이야기를 나눴다며, 두 사람을 축복하겠다고 말했다. 이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그럼 이제 계획을 짜야겠구나. 봄의 결혼식이라. 아니, 6월이 되려나.”
“아니에요.” 이디스가 말했다.
“음? 뭐라고?” 보스트윅 부인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물었다.
“기왕 결혼할 거면 빨리했으면 좋겠어요.”
“젊은이들은 성급하기도 하지.” 보스트윅 씨가 이렇게 말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네 어머니 말이 옳다, 얘야. 이런저런 계획을 짜야 하니까 시간이 필요해.”
“아니에요.” 이디스가 다시 말했다. 그 단호한 목소리에 모두들 그녀를 바라보았다. “반드시 빨리해야 돼요.”
11. 그가 거의 대문에 다다랐을 때 뒤에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이디스였다. 키가 큰 그녀가 뻣뻣하게 서서 창백한 얼굴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의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할게요, 윌리엄.” 그녀가 말했다. “노력할 거예요.”
그는 자신이 이 집에 온 뒤로 누구든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은 지금이 처음임을 깨달았다.
12.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혹감에 사로잡힌 스토너는 돕겠다는 뜻을 굽히고, 이디스가 어두운 표정으로 반짝이는 바닥과 벽을 서투르게 문지르고, 커튼을 꿰매 높은 창문에 들쭉날쭉하게 매달고, 하나둘씩 늘어난 중고 가구들을 수리하고 몇 번이나 색칠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비록 솜씨는 서툴렀지만 그녀는 말없이 사나울 정도로 맹렬하게 움직였다. 그래서 윌리엄이 오후에 대학에서 집으로 돌아와 보면 그녀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지친 몸을 끌고 힘들게 저녁식사를 준비한 뒤 겨우 몇 입만 먹고는 몇 마디 중얼거린 뒤 침실로 사라져 약에 취한 사람처럼 잠들기 일쑤였다. 그녀는 다음 날 윌리엄이 학교로 출근할 때까지 깨지 않았다.
한 달도 안 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 그는 침묵을 배웠으며, 자신의 사랑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가 애정을 담아 그녀에게 말을 걸거나 몸을 만지면, 그녀는 그를 외면하고 내면으로 숨어 들어가 아무 말 없이 견디기만 했다. 그러고 나서 며칠 동안 전보다 한층 더 힘들게 새로운 한계까지 자신을 혹사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같은 침대를 쓰는 것만은 고집스럽게 그만두지 않았다.
13. 스토너가 사나울 정도로 강렬하게 학생들을 가르쳤으므로, 학과의 새로운 얼굴들 중 일부는 경이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그를 알던 동료들 중에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얼굴이 점점 수척해지고, 체중이 줄었으며, 어깨도 한층 더 구부정해졌다. 그해 2학기에 수업을 과중하게 맡아 추가로 보수를 받을 기회가 생기자 그는 그 기회를 잡았다. 또한 그해에 새로 생긴 여름학기에서도 역시 추가로 보수를 받기로 하고 강의를 맡았다. 그는 해외여행을 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자기 때문에 유럽여행을 포기한 이디스에게 유럽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14. 아이는 1923년 3월 중순 사흘간의 산고 끝에 태어났다. 두 사람은 오래전 세상을 떠난 이디스의 이모 이름을 따서 딸의 이름을 그레이스라고 지었다.
그레이스는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예쁜 아이였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금발은 아직 솜털 같았다. 빨갛던 피부도 며칠 만에 반짝이는 황금색이 깃든 분홍색으로 변했다. 아이는 잘 울지 않았으며, 마치 주위 환경을 잘 인식하는 것 같았다. 윌리엄은 아이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이디스에게 줄 수 없는 사랑을 딸에게는 줄 수 있었다. 그는 아이를 돌보는 일이 이렇게 기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15. 윌리엄의 아파트 앞에 차를 대기 직전에 고든 핀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지만, 아까 예배 중에 나는 계속 데이브 매스터스를 생각했네. 프랑스에서 죽은 데이브와 자기 책상에 앉아 죽은 채 이틀을 보낸 슬론. 두 사람의 죽음이 같은 종류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나는 슬론하고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아마 좋은 사람이었겠지. 적어도 내가 듣기로는 그렇다고 했네. 그런데 이제는 새로운 교수를 물색하고, 새로운 학과장도 찾아봐야 해. 모든 게 그냥 이런 식으로 계속 돌고 도는 것만 같아. 도대체 이것이 다 뭔가 하는 생각이 드네.”
“맞아.” 윌리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고든 핀치에게 커다란 호감을 느꼈다. 그는 차에서 내려 고든의 차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지나온 과거의 또 다른 한 부분이 거의 알아보기 힘들 만큼 천천히 그에게서 멀어져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음을 절감했다.
16. 이렇게 꾸민 끝에 서재가 서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비밀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지 하나가 묻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방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그가 책꽂이를 만들기 위해 낡은 판자들을 사포로 문지르자 표면의 거친 느낌이 사라졌다. 낡은 회색 표면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면서 나무 본래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더니, 마침내 풍요롭고 순수한 질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가구를 수리해서 서재에 배치하는 동안 서서히 모양을 다듬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질서 있는 모습으로 정리하던 것도, 현실 속에 실현하고 있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17. “당신 아버지 일이오.” 남자가 말했다.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군.”
건조하고, 간결하고, 겁을 먹은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윌리엄은 멍하니 귀를 기울였다. 마치 그 목소리가 귀에 대고 있는 수화기 속에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남자의 이야기는 아버지에 관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거의 일주일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일꾼 혼자서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일을 다 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새벽 일찍 씨를 뿌리러 나갔다고 했다. 아버지는 오전 중반에 일꾼에게 발견되었다. 울퉁불퉁한 밭에서 의식을 잃고 앞으로 엎어져 있었다. 일꾼은 아버지를 집으로 데려와 침대에 눕히고 의사를 데려오려고 나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정오가 되기 전에 숨을 거뒀다.
“전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토너가 기계적으로 말했다. “어머니께 내일 제가 가겠다고 전해주세요.”
18.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스토너는 주말을 이용해서 최대한 자주 고향집을 찾았다. 그때마다 어머니가 점점 마르고, 창백하고, 고요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결국은 어머니의 움푹 파인 밝은 눈만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마지막 며칠 동안 어머니는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허공을 빤히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가끔 작은 한숨 소리가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그는 어머니를 아버지와 나란히 묻어주었다. 예배가 끝나고 몇 명 되지 않는 조문객들도 돌아간 뒤, 그는 11월의 차가운 바람 속에 혼자 서서 두 개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하나는 아직 열려 있었고, 다른 하나는 봉분 위에 가느다란 솜털 같은 잔디가 덮여 있었다. 그는 자기 어머니나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묻혀 있는 이 황량하고, 나무 하나 없는 작은 땅으로 시선을 돌려 평평한 땅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태어난 집,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생을 보낸 집이 있는 방향이었다.
19. 그리고 사흘 뒤 호러스 보스트윅이 죽었다. 자살이었다. 그는 어느 날 아침 유난히 유쾌한 표정으로 은행에 출근했다. 그는 문을 닫은 은행에서 아직 일하고 있는 여러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비서에게 전화를 연결하지 말라고 이른 뒤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오전 10시경 전날 구입해서 서류가방에 넣어 가져온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쏘았다. 유서는 남기지 않았지만, 책상에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들이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을 대변해 주었다.
20. 이디스는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꼭 끼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자가 머리를 단단히 조이는 바람에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불규칙한 모양의 틀처럼 얼굴을 바싹 감싸고 있었다. 입술에는 밝은 오렌지레드를 발랐고, 작은 볼연지 자국 두 개가 광대뼈를 날카롭게 강조해 주었다. 옷은 지난 몇 년 동안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짧은 드레스였다. 어깨에서부터 똑바로 늘어진 옷자락이 무릎 바로 위에서 끝났다. 그녀는 남편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딸에게 다가갔다. 딸은 바닥에 앉은 채 조용히 신중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디스가 어색하게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았다. 새 옷의 끝단이 다리를 단단하게 조였다.
21.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가엾은 윌리.” 그러고는 다시 딸에게 시선을 돌렸다. “난 달라졌어.” 그녀가 딸에게 말했다. “정말 달라진 것 같아.”
윌리엄 스토너는 이것이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왠지 이디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의도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에게 새로이 선전포고를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22. 이제 그는 딸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세 식구가 함께 식사를 하기는 했지만, 그럴 때도 그는 감히 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가 말을 걸고 그레이스가 대답하기라도 하면 이디스가 곧 그레이스의 식사예절이나 앉은 자세에서 잘못된 점을 찾아내기 때문이었다. 이디스의 말투가 어찌나 신랄한지 아이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내내 풀이 죽어서 침묵을 지키곤 했다.
그렇지 않아도 호리호리하던 그레이스의 몸이 더욱더 여위기 시작했다. 이디스는 아이가 “옆이 아니라 위로 자란다.”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아이의 눈은 조심스럽다 못해 거의 경계의 눈빛을 띠었다. 조용하고 차분하던 표정은 이제 살짝 뚱해지거나 히스테리에 가까울 만큼 활기를 띠는 양극단을 오갔다. 미소는 거의 짓지 않았지만, 소리 내어 웃는 경우는 많았다. 어쩌다 미소를 지을 때면 마치 유령이 얼굴을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23. 마침내 그는 밤에 연구실로 나오는 것이 자신에게 일종의 피난이자 구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연구실에서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그리고 거기서 약간의 위안과 기쁨, 심지어 이렇다 할 목적이 없는 공부에서 예전에 느꼈던 즐거움의 흔적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아이에게 강박적으로 집착하던 이디스의 태도가 조금 느슨해졌기 때문에 아이도 이제 가끔 미소를 지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편안한 태도로 이야기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가끔 이만하면 살 만하다고,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24. 스토너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알겠네, 워커 군. 자네는 마음을 정한 거로군. 이제 가봐도 좋네.”
워커가 말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교수님? 저는 이번 강의에서 무엇을 얻게 되는 거죠?”
스토너는 짧게 웃었다. “워커 군, 정말 놀라운 사람이군. 자네는 당연히 F학점을 받을 걸세.”
워커는 둥근 얼굴로 우울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순교자처럼 고난을 참는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교수님. 사람이란 신념 때문에 이렇게 고난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군요.”
“게으름과 부정직과 무지 때문에도 고난을 각오해야 하지.” 스토너가 말했다. “워커 군, 이런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긴 하네만, 지금 자네의 처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라고 강력히 충고하고 싶네. 자네가 대학원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인지 심히 의심스럽군.”
처음으로 워커가 진실한 감정을 드러냈다. 분노가 그를 거의 위엄있게 만들어주었다. “스토너 교수님, 지나친 말씀입니다!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요.”
“분명히 진심일세.” 스토너가 말했다.
25. 스토너는 가차 없이 질문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워커와 로맥스 두 사람 모두에게 분노를 느꼈지만, 나중에는 분노가 일종의 연민과 지독한 유감으로 변했다. 스토너는 자신이 몸에서 빠져나와 냉정한 태도로 치명적인 질문들을 계속 던지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26. 그의 주위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질질 끌리듯이 흘러갔다. 그는 집에서 아내와 딸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리려고 했지만, 괴상한 강의 시간표 때문에 애매한 시간에만 집에 있을 수 있었으므로, 이디스의 빡빡한 일일 계획표와는 맞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자주 집에 있는 것에 아내가 신경질적이 될 만큼 동요해서 말문을 닫아버리거나 때로는 정말로 앓아눕기까지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집에 머무르는 동안 그레이스를 자주 볼 수도 없었다. 이디스가 딸의 일정을 세심하게 짜놓았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짬’이 나는 것은 저녁시간뿐인데, 스토너는 일주일에 나흘이나 늦은 시간에 저녁강의가 잡혀 있었다. 그래서 강의가 끝날 무렵이면 대개 그레이스는 잠들어 있었다.
그가 그레이스를 볼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짧은 아침식사 시간뿐이었다. 그나마도 아이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이디스가 식탁 위의 접시들을 개수대로 가져가 물에 담그는 몇 분 동안이 고작이었다. 그는 아이의 몸이 점점 길쭉하게 자라고, 팔다리가 서투르지만 우아하게 변하고, 차분한 눈과 주의 깊은 얼굴에서 지성이 점점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때로는 딸과의 사이에 아직 친밀함이 조금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두 사람 모두 감히 그 친밀함을 인정할 수 없었다.
27. 자신의 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그의 생각에는 그런 것 같았다). 문제의 의문이 지금 자신이 직면한 가장 뻔한 원인, 즉 자신의 삶에서 튀어나온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나이를 먹은 탓에, 그가 우연히 겪은 일들과 주변 상황이 강렬한 탓에, 자신이 그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탓에 그런 의문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는 보잘것없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것들 덕분에 이런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우울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느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無)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28.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두 사람 모두 수줍어하면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서로를 알아갔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도 하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물러나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에게 억지로 자신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을 보호해 주던 과묵함이라는 막이 한 층씩 떨어져 나가서 마침내 두 사람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지극히 수줍어하면서도 서로에게 무방비하게 마음을 열고 함께 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지는 관계가 되었다.
스토너는 거의 매일 수업이 끝난 오후에 그녀의 집으로 왔다.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 또 사랑을 나눴다. 아무리 놀아도 지치지 않는 아이들 같았다. 그렇게 봄날이 흘러갔고, 두 사람은 여름을 고대했다.
29. 하지만 고든 핀치의 사무실을 나선 순간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존재의 작은 중심에서 자라난 무감각한 공간 속 어딘가에서 자기 인생의 일부가 끝나버렸음을. 자신의 일부가 거의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이라서 다가오는 죽음을 거의 차분한 태도로 지켜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초봄 오후의 밝고 산뜻한 온기 속에서 캠퍼스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자신을 어렴풋이 인식했다. 길가와 앞뜰에 늘어선 층층나무들은 흐드러지게 핀 꽃을 매단 채, 그의 눈앞에서 반투명하고 엷은 구름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생명이 꺼져가는 라일락꽃의 달콤한 향기가 사방을 흠뻑 적셨다.
30. 캐서린 드리스콜과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가 그녀의 곁을 떠난 뒤 아직 날이 밝기 전에 그녀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소지품을 모두 챙기고 책을 마분지 상자에 넣어 포장했다. 그리고 아파트 관리인에게 짐을 보내달라고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녀는 학생들의 성적 채점결과와 함께 아직 일주일 반이 남은 수업을 종강시켜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영문과 사무실에 우편으로 보내왔다. 사직서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오후 2시 기차에 몸을 싣고 컬럼비아를 떠났다.
그녀는 얼마 전부터 떠날 계획을 미리 짜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스토너는 그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그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것에, 그리고 그녀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담은 마지막 편지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했다.
31. 그해 여름에 그는 급속히 늙어갔다. 그래서 가을에 다시 강의를 하게 되었을 때, 몇몇 사람들은 그를 언뜻 알아보지 못해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수척하고 앙상해진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패었고, 머리에도 흰머리가 무겁게 내려앉았으며, 등이 심하게 굽어서 마치 보이지 않는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았다. 목소리는 조금 거칠고 무뚝뚝하게 변했다. 또한 고개를 숙인 채 한 사람을 빤히 바라보는 버릇이 생겨서 헝클어진 눈썹 밑의 선명한 회색 눈이 예리하고 성마르게 보였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 외에는 누구에게도 거의 말을 건네지 않았으며, 남들의 질문과 인사에 답할 때는 항상 조급해 보였다. 때로는 거친 반응을 보일 때도 있었다.
32. 몇 주 뒤 스토너는 그날 오후에 로맥스가 핀치의 사무실로 쳐들어왔던 일을 핀치에게서 직접 들었다. 로맥스는 스토너의 행동을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그가 중세영어 상급과정에나 알맞은 내용을 1학년들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핀치에게 그를 징계하라고 요구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핀치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동안 웃으면서 간간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웃음이 말을 밀어냈다. 마침내 웃음이 잦아들자 그는 로맥스에게 사과한 뒤 이렇게 말했다. “그 친구한테 당한 거요, 홀리. 모르겠습니까? 그 친구는 물러서지 않을 거요. 그리고 당신은 전혀 손을 쓸 수 없어요. 나더러 당신 일을 대신 해달라고요? 그러면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이겠소? 학장이 고참 교수의 강의에 간섭하는 걸로 모자라서, 그 학과의 학과장 선동에 넘어가 그런 짓을 하다니. 그건 안 될 일이오. 그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해결하시오. 최선을 다해서.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을 거요. 그렇지요?”
33. 스토너는 그녀의 모든 행동, 즉 분노, 고뇌, 고함, 증오에 찬 침묵 등을 모두 남의 일처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자신은 일부러 애를 써도 그것에 대해 고작 형식적인 관심밖에 보일 수 없는 것 같았다.
마침내 이디스는 지칠 대로 지쳐서 거의 고마운 심정으로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강렬하던 분노는 점점 누그러져서 스토너의 형식적인 관심처럼 형식적인 수준이 되었다. 길고 긴 침묵은 상대의 무관심을 공격하는 수단이 아니라, 스토너가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 개인적인 공간으로 물러나는 수단이 되었다.
34. 스토너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돌려 바닥을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아버지. 저 때문에 충격받으셨죠?” “아니다.” 스토너가 말했다. “놀란 것 같기는 하다만. 지난 몇 년 동안 우린 사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했잖니, 그렇지?” 아이가 시선을 피하며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뭐, 그랬던 것 같아요.” “너…… 그 청년을 사랑하니, 그레이스?” “어머, 아니에요.” 아이가 말했다. “그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어떻게 하고 싶니?” “모르겠어요.” 아이가 말했다.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전 골칫덩이가 되고 싶지 않아요.”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마침내 스토너가 말했다. “뭐, 걱정 마라. 다 잘될 거야.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네가 원하는 일이 무엇이든, 다 잘될 거야.” “네.” 그레이스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의자에서 일어나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버지랑 저, 이제는 이야기를 할 수 있네요.” “그래.” 스토너가 말했다. “이야기를 할 수 있어.”
35. 결혼식 닷새 전에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다. 윌리엄 스토너는 전에 없이 엇갈린 심정으로 결혼식을 지켜보았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멍한 상태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주 깊고 강렬한 여러 감정들이 그 안에 혼합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차마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인정할 수도 없는 감정들이었다. 그를 강타한 것은 국가적인 비극에 대한 감정이었다. 거기서 느낀 경악과 비통함이 무엇에든 배어 있어서 개인적인 비극이나 불행은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이 처해 있는 전체적인 상황의 무게가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일들에 관한 느낌도 한층 강렬해졌다. 사막에 홀로 솟아 있는 무덤이 바로 주위를 둘러싼 광활한 사막 때문에 더욱 외롭게 보이는 것과 같았다. 무심함에 가까운 연민을 안고 그는 그 슬픈 결혼식을 지켜보며 딸의 얼굴에 나타난 얌전하고 무심한 아름다움과 청년의 얼굴에 나타난 뚱한 절망에 묘한 감동을 느꼈다.
결혼식이 끝난 뒤 두 젊은이는 전혀 즐겁지 않은 표정으로 프라이의 작은 무개 자동차에 올라 세인트루이스로 출발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청년의 부모를 만난 뒤 자리를 잡고 살게 될 터였다.
36. 그레이스가 컬럼비아를 떠난 것이 사실은 감옥을 벗어나려는 시도였음을 그는 이제 알고 있었다(어쩌면 임신도 그런 시도일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상냥함과 부드럽고 선한 의지 때문에 그 감옥을 다시 찾고 있었다. 이디스는 짐작하지 못했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만, 그레이스가 술을 은근히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스토너는 알고 있었다. 그가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전쟁이 끝난 해의 여름이었다. 그레이스가 며칠 동안 친정에 다니러 왔는데, 유난히 지쳐 보였다. 눈가에 거뭇한 그림자가 졌고, 창백한 얼굴은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37. 이 시절에 그가 이처럼 일에 헌신하는 태도에서 멀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가끔 딸이 이 방 저 방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처럼 컬럼비아에 다니러 오면, 그는 참기 힘들 만큼 강렬한 상실감을 느꼈다. 이제 스물다섯 살인 그레이스는 그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희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처럼 계속 주저하면서도 술을 마셨고, 세인트루이스의 조부모에게 아이에 대한 통제권을 점점 넘겨주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스토너가 캐서린 드리스콜의 소식을 들은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1949년 초봄에 동부의 대형 대학 출판부에서 보낸 광고전단이 그에게 날아왔다. 거기에 캐서린의 책이 출판된다는 소식과 함께 그녀에 대한 설명이 몇 마디 적혀 있었다. 그녀는 매사추세츠의 훌륭한 교양학부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으며, 미혼이었다. 그는 최대한 빨리 그 책을 구해 보았다. 그 책을 손에 쥐자 손가락들이 생명을 얻어 살아나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너무 떨려서 책을 펼치기도 힘들었다. 맨 앞의 몇 장을 넘기자 헌사가 보였다. “W. S.에게.”
38.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스토너가 다시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에 묘하게 힘이 실리는 것이 느껴졌다. “뭐냐면, 내 생각이 바뀌었네……. 그러니까 퇴직에 대해서 말이야. 좀 어색한 상황인 건 알아. 이렇게 늦게야 말해서 미안하네. 하지만…… 글쎄, 이것이 두루두루 최선인 것 같네. 이번 학기 말에 그만두겠네.”
39.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떠난 뒤 조급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들이 가끔 있었다. 별로 여행을 하고 싶지도 않으면서 여행을 떠나는 순간을 기대하는 사람처럼. 모든 여행자가 그렇듯이, 그도 떠나기 전에 할 일이 아주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일들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40.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장을 펄럭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짜릿한 느낌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살과 뼈를 훑었다.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그를 가둬주기를, 공포와 비슷한 그 옛날의 설렘이 그를 지금 이 자리에 고정해 주기를 기다렸다. 창밖을 지나가는 햇빛이 책장을 비췄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 쓰인 글자들을 볼 수 없었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
'독서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존재의 수학 (2) | 2026.03.22 |
|---|---|
| 아프다고 말해주면 좋겠어 (0) | 2026.03.11 |
| 서울 건축 여행 (2) | 2026.03.05 |
| 자존감 수업 (0) | 2026.02.20 |
| 처음 만나는 양자의 세계 (1) | 2026.02.05 |